289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8월 12일)
지난 토요일부터 읽고 있는 <<주역>>의 제 6괘인 <천수송> 괘는 억울한 일을 겪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선 어제 다 못 읽은 상괘부터 시작한다.
4. 상괘의 맨 아래인 '구사'의 효사는 다음과 같다. "九四(구사)는 不克訟(불극송)이라 復卽命(복즉명)하야 渝(유, 투)하야 安貞(안정)하면 吉(길)하리라"이다.
'구사'는 송사를 이기지 못한다. 돌아와 명에 나아가 변해서, 편안하고 바르게 하면 길할 것'이라는 거다. TMI: 復:돌아갈 복, 卽:나아갈 즉, 渝:변할 유, 변할 투. '구사'는 '구오' 천자를 보필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大臣)에 해당한다. '구사'는 음자리에 강한 양효로 있어, '구오' 천자와 '구이'의 지방 제후가 전쟁을 벌이는 형국에서 '구사' 자신도 천자가 되어 보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배신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천자의 명을 좇아 잘못된 마음을 변하여 안정하면 길하다.
'구사'는 득증(得中)의 자리에 있지도 않고, 또 음의 자리인 '사(四)'에 있는 양효라서 득정(得正)도 아니다. '구사'와 응하는 자리는 '초구'인데, '초구'는 '구이'에 더 가깝고, 또 송사를 길게 끌고 갈 의사가 없다. 그래서 고립된 '구사'는 송사를 성공적으로 잘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不克訟, 불극송). 그래서 그는 생각을 바꾼다. 다시 원초적 시발점으로 돌아가 천명을 새롭게 받는다(復卽命, 복즉명). 그리고 삶의 자세를 바꾼다(渝, 유 또는 투). 송사를 좋아하던 삶의 자세를 바꾸니 삶이 편안해 진다(渝安, 유 또는 투안). 그리고 점을 치면 길하다(貞吉, 정길). 삶의 운이 좋게 돌아가는 것이다. 소송을 그만두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는다.
'구사'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復卽命渝安貞(복즉명유안정)은 不失也(불실야)라"이다. 이 말은 '상전에 말하였다. 돌아와 명에 나아가 변해서 편안하고 바름은 잃지 않는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천자에게 대적하려는 잘못된 마음을 바꾸어 천자의 명을 좇아 안정하면 길하다'는 것은 대신으로의 지위와 명을 잃지 않는 것이다.
5. "九五(구오)는 訟(송)애 元吉(원길)이라"가 효사이다. '구오는 송사에 크게 길하다'는 거다.
'구오'는 양자리에 양효로 거하고 외괘(상괘)의 중(中)을 얻어 중정(中正)하니 온 나라를 다스리는 천자에 해당한다. 비록 위 하늘(☰)과 아래 물(☵)이 어긋나 행하는 형국이 되어 지방 토후세력이 반란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구오의 중정(中正)한 자리를 침탈할 수 없으니 크게 길하다.
'구오'는 중정의 덕을 지니고 있는 재판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오'는 사적인 인연에 끌림이 없이 소송 당사자들의 의견을 허심하게듣는다. 정중의 지존의 도덕을 지키는 '구오'에게는 아무리 송사가 있더라도(訟,송), 송사에 시달림이 없이 크게 길하다는 뜻이다(元吉, 원길).
<소상전>은 "象曰(상왈) 訟元吉(송원길)은 以中正也(이중정야)라"고 말한다. '상전에 말하였다. 송사에 크게 길한 것은 가운데하고 바르기 때문'이라는 거다. 중정은 꼭 제왕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중정의 자리(位)에 않을 수 있다. 누구나 소송을 잘 처리하면 크게 길할 수 있다.
6. 마지막, "上九(상구)는 或錫之鞶帶(혹석지반대)라도 終朝三褫之(종조삼치지)리라'가 효사이다.
'상구'는 혹 반대(큰 띠)를 주더라도, 아침이 마치는 동안 세 번 빼앗을 것이다'로 번역된다. TMI: 錫:줄 석, 鞶:큰 띠 반, 帶:띠 대, 褫:빼앗을 치. '상구'는 외괘 '건천(乾天, ☰)'의 극에 처해 있으며, 중을 얻지 못하고 음자리에 양효로 강하게 있어 처신을 지나치게 하는 상황이다. 맨 위에 거하여 지나침을 모르고 무조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니, 전쟁에서 이기지만 많은 불상사(不祥事)를 초래하게 된다. 비록 전쟁에 이겨 천자가 상으로 주는 "반대(鞶帶, 허리에 두르는 관대)"를 받더라도 힘으로 제어하는 상황에서 빚어진 원성(怨聲) 때문에 "반대"를 도로 빼앗긴다. 상구가 변하면 '태(兌. ☱) '연못' 괘가 되니 훼절 당하여 빼앗기고 전성기가 기울어지는 상이다.
여기서 "관대"는 말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넓적한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이다. 이 표현은 북방기마민족의 습속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종조(終朝)"는 노자 <<도덕경>> 제23장에 있는 "회오리바람은 아침 한때를 마칠 수 없다(飄風不終朝, 표풍부종조)"라는 표현과 동일한 맥락이다. 회오리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못하는 것처럼, 소송의 승리물은 곧 사라질 것이라는 뜻이다.
소송의 승리의 상징으로 관복을 하사 받지만, 이렇게 송사를 치열하게 진행시켜 얻은 승리의 관복은 하루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이나 빼앗기고 말것이다. 송사로 얻는 명예는 결코 생애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소상전>에서도 송으로 얻은 관복은 공경할 것이 못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以訟受服(이송수복)이 亦不足敬也(역부족경야)라"이다. '상전에 말하였다. 송사로써 복종을 받음이 또한 족히 공경할만한 것이 아니다”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상구'가 맨 위에 있으면서도 덕으로 해결하지 않고 어떠한 상황이든 전쟁이나 송사를 통해 복종을 받는 것은 공경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이제까지 살펴 본, <천수송> 괘는 억울한 일을 겪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법'을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법의 중요한 기능은 질서 유지보다는 약자 보호였다. 국회는 법을 통해 사회의 질서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토론과 논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 세력과 법률 제정이 긴밀하게 이어지고,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기득권 집단의 로비가 큰 영향을 마치기 시작하면서, 국회 제정 입법의 상당수가 '기득권 보호'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의회에서 다르는 많은 법의 초안이 관련 이익단체에서 만든 것이다. 법치사회와 운명처럼 맞닿아 있는 법과 기득권 유지의 사슬을 끊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 필요한 것이 사회 정의이다. "나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고 알베르 카뮈가 말하였다. 나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그 사회로부터 이 같은 의식을 배웠다. 프랑스에서는 좌파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폭넓게 동의를 얻고 있다. 이 말은 이렇게 다시 고쳐 말할 수 있다. "사회정의가 질서보다 더 중요한 가치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 질서'가 '사회 정의'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고 있다.
'기초 질서를 지키자'는 구호를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우리는 '안보 이념'을 정의나 자유, 평등의 가치보다 더 강조 받고 있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질서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계속해서 주입 받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분단 상황을 이용한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어,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사회정의의 요구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받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정의보다 질서를 강조하는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사회변화를 두려워하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가 수구보수세력들에 투표하는 것도 이 두려움의 표시이다.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사회정의가 사회질서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말이다. '질서에 대한 무의식의 복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안정을 추구하는 본능적 경향이 있다. 우리 인간은 무질서와 혼란은 불안과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에 은연중에 안정 상태, 아니 중지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거다. 지배세력이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의와 차별, 배제가 이루어지고, 억울함과 굴종을 강요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회정의를 계속 요구하여야 한다.
법률 소송의 개념을 다룬 <천수송>괘의 관점은 가능한 한 권력자와 소송을 하는 건 피하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법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공평하지 않다. 인간은 선하지 않고, 인간의 내부에는 근원적인 악마성이 있다. 그러므로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법만으로 사람을 다스릴 수 없기에 법 없이도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성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
오랫동안 교육을 통해 인간의 악마성을 순화하고 예의와 질서를 지키고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법치라는 이름의 관료주의가 미치는 해악은 인간의 악마성 못지않은 구조적 악이 되고 있다. <천수 송> 괘가 이 점을 말하고 있다. 법을 이용하여 민중의 고통을 구원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 에든 있다. 그러나 사회가 그냥 두지 않는다. 권력자를 심판한 재판관은 어떤 형태로든 보복을 받는다. 아침이 되기도 전에 그들은 세 번이나 위기 의식을 느껴야 한다. 법대로 사는 정의로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거다. 우리는 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찾아야 한다. 급하다. 지금 우리 사회가 잘 보여주지 않는가?
이럴 때, 나는 다음 시를 읽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는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도 아주 좋다. 짐승들도 이렇게 사는 데, 우리는? 갤러리 상신에서 만난 소녀처럼, 고개가 기울어진다.
산다는 것의 의미/이시영
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 밖에 안 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 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라다주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은 더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1976년의 일이다. 충청도 산골에서 어떤 소년이 다람쥐 한 마리를 사로잡아 체 속에 가두었다. 장차 쳇바퀴 돌리는 서커스 기예를 펼치게 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체가 바람에 뒤집힐까 봐 주먹만 한 돌 몇 개를 얹어 놓았다. 소년이 마당에서 노는 동안 다람쥐 여러 마리가 체 감옥에 면회를 온 듯 북적거렸다. 별 일 있으랴 싶었다. 시간이 지나서 가보니 체 감옥이 뒤집혀 있었다. 다람쥐 동료들이 와서 돌들을 밀어내고 탈옥을 시킨 것이었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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