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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배려는 상대의 입장에서 서 보는 일이다.

3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12일)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다. 나는 백신을 1, 2차 다 접종했지만, 거리에서 반드시 마스크를 쓴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 일을 삼갈 수 있어야 한다. 한계를 모르는 자유는 위험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한 밤중에 등불을 밝혀 들고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비웃듯이 물었다. "낮이든  밤이든 분별하지 못하는 당신이 등불을 들고 가는 까닭이 뭐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등불을 밝혀 든 것은 나를 위해서 아니라,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것이 배려의 마음이다. 배려는 우리 일상에서 꼭 드러나야 할 사람됨의 드레(순 우리말, 인격적으로 점잖은 무게)이다. 배려는 상대의 입장에서 서 보는 일이다.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공유한다. *TMI: '드레'는 '인격'보다 가리키는 범위가 더 넓기에 '인격적인 부족함'과 '드레가 없음'은 전달하는 의미가 다르다.

둘이 죽도록 사랑하는 소와 사자가 있었다. 그 둘은 결혼해 살게 되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 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었다. 둘은 마주 앉아 얘기하게 되었다. 문제를 잘못 풀어놓으면 큰 사건이 되고 만다. 소와 사자는 다투었다. 끝내 헤어지고 만다. 헤어지고 서로에게 한 말, '난 최선을 다 했어'였다.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이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 뿐이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 보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만다.

그래 살다 보면, 깊은 사려(思慮)가 필요하다. '사려'란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는 거다. 배려(配慮)도 거기서 나온다. '사려가 깊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항상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염두에 두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은 좋아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또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한다.

사려 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존중해줘야 하고,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도 내가 필요로 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역지사지(易地思之)' 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는 이기적인 '역지사지' 즉, 내가 필요할 때만 '역지사지'하지 않는다고 남 탓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한 마을에 이웃한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은 넓은 초원에 많은 염소를 키우고 있었고,  그 옆집에는 사냥꾼이 살았는데 아주 사나운 개를 키우고 있었다. 이 사냥개는 종종 집 울타리를 넘어 염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걸 본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개들을 우리에 가둬 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지만, 사냥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냈다. 오히려 속으로 화를 내며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우리 집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데 무슨 상관이야'라고 했을 거다. 며칠 후 사냥꾼의 개는 또 농장의 울타리를 뛰어 넘었고, 염소 몇 마리를 물어 죽였다. 화가 난 염소 주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마을의 치안판사에게 달려갔다. 염소 주인의 사연을 들은 판사는 "사냥꾼을 처벌할 수도 있고, 또 사냥꾼에게 개를 가두도록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판사는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친구를 잃고 적을 한 명 얻게 될 겁니다. 적과 이웃이 되고 싶으신 가요?  아니면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으신 가요?" 염소 주인은 "당연히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죠"라고 답했다. 판사는 "잘됐군요.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 그렇게 해보시죠. 그럼 당신의 염소도 안전하고 좋은 이웃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제안했다. 판사에게 방법을 전해들은 염소 주인은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 사랑스러운 새끼 염소 3마리를 골라 이웃집을 찾았다. 그리고 그 이웃의 어린 세 아들에게 염소를 선물했다. 사냥꾼의 세 아들은 염소를 보자마자 푹 빠졌다.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염소들과 놀며 시간을 보냈다. 아들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사냥꾼의 마음도 행복했다. 그러다 문득 마당의 개가 염소를 물어서 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 사냥꾼은 개를 큰 우리에 가뒀다. 염소 주인도 그제야 안심을 했다. 사냥꾼은 염소 주인의 친절함에 보답하려고 사냥한 것들을 그와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면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염소 우유와 치즈를 보답으로 주었다. 그후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이웃이자 친구로 지냈다.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대와 달리 더 많은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염소 주인이 이웃을 벌하려고만 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가장 가까이 살지만 먼 이웃이 되지 않았을까? 그동안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내는 이웃이 있다면, 먼저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마음을 담아 전달해 봄이 어떨까?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아름답다. 먼저 마음을 여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 손해는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니다.

매너는 에티켓과, 엄밀하게 말하면 그 뜻이 다르다. 에티켓이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사회적인 불문율로써 하나의 규범'이라면, 매너는 실제 생활 현장 속에서 그 '에티켓을 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다음의 예를 보면, 우리는 금방 이해 할 수 있다. 우리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하여야 한다'는 것은 규범으로서 에티켓이고, ‘노크를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하는 방법은 매너에 속한다. 따라서 에티켓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없다. 에티켓에 맞는 행동이라 해도 매너가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행동은 예의를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로서의 매너의 기본원칙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진정한 매너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배려심이다. 그 배려심은 자신이 불편을 자초(自招)해야 한다. 난 '자초'란 말을 좋아한다.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기 때문이다.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기 때문이다.

서로 결을 받아들이면, 같음과 다름이 함께 할 수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개입하여 넘나들고 매만지면서 가늠하고 이해하는 세상이 된다. 서로 결을 헤아리며 살고 싶다. 시인의 모래처럼, 마음이 지붕 고치듯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번민, 소요와 분쟁은 사라질지라도 모를 일이지만,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 마음을 바꾸는 것만이 정답이다. 사람에 대한 아픔은 사람으로 잊는 것이 가장 낫다. 사람에 대한 섣부른 기대는 사람 결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로 대신할 수 있다. 사람 결을 만드는 사람들을 둘러 본다.

결/이사라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깃털 같은 마음으로
사막에 집을 짓는 건축가도 있다.
눈빛 속에 사람을 심는 예술가도 있다.

태어나서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디든 지붕만 얹으면 살아나는 것이 집이라며

물이 물결을 만들 듯이
나무가 나뭇결을 만들 듯이
결이 보일 때까지 느긋하게 살면서
사람 결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지붕 고치듯 마음만 고치면
몇 백 년을 훌쩍 넘긴 마음도 가질 수 있다.


좋은 매너는 자신의 불편을 자초(自招)하는 일이다. 불편을 자초하지 않고는 덕의 활동인 '성스러움'을 얻을 수 있다.  덕은 도를 일상 생활에 실천하는 행위이다. 도는 우주가 돌아가는 '음양오행'의 원칙이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얼마나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의 정도로 나타난다. 한 시민, 아니 한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덕' 지키는 것이 자신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면 속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경박함을 흡수하는 중후함이 필요하다. 경박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가끔 다음과 같은 사람을 만나면 당혹스럽다.
- 많은 말을 나누고도 허전한 느낌만 남기는 사람
-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져 자기 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람

왜 사람들은 같은 일에 각기 다른 깊이로 반응하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바탕의 크기가 잘 사는 삶의 크기와 같다. 공부하는 이유도 이 바탕의 넓이를 키워 나가는 행위이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 인 사람도 있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 다른 사람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에는 분개하면서 정작 자신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
- 기차에서 전화가 오면 안하무인격으로 앉은 자리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
- 다른 사람의 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날을 새는 사람
- 밖에서는 민주를 외치지만, 집에 오면 독재자로 변하는 사람
- 환경 보존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들을 마구 쓰는 사람

교회에 나와 이웃 사랑에 관한 설교를 듣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일을 하느라 이웃에 큰 폐를 끼친다. 큰 대로에 차를 주차하고 예배에 참여 해, 근처의 주민들을 불편하게 한다. 제대로 사는 일, 그건 힘들고 불편하다. 실제로 이웃과 지구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일정 분량의 불편과 노고를 감당해야 한다.  예컨대, 교회에 갈 때 버스를 이용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일회용 물건을 쓰기는 쉽다. 그러니 그것들을 안 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컵을 가지고 다니는 등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기능적인 일은 쉽다. 반면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기능을 작동 시킬 때, 그 이유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밥 먹는 일이 기능이라면, 어떤 식으로 먹느냐는 것은 그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이다. 대답은 기능적 활동이고, 질문은 그 사람에게만 있는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일이라 인격적 활동에 속한다. 당연히 질문은 어렵고, 대답은 쉽다. 따라하기는 쉽고, 창의가 어려운 이치와 같다. 우리는 쉬운 쪽으로 쉽게 기울게 되어 있어 질적인 상승이 더디다. 그래서 제대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 잘 사는 방법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다양한 수행의 모든 과정은 사실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편하고 자극적인 기능에 갇히지 않고, '불편'의 상태를 자초하면서 성숙은 시작된다. 오늘도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더 불편한 하루를 살고 싶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도덕경>> 제22장)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도덕경>> 제7장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만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자신이 앞서게 된다. 자신을 소홀히 하지만, 오히려 보존된다."고 했다. 노자는 앞서고 보존되기 위해서,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할 뿐이다. 나를 구부리고, 덜어내고 비우면서, 나를 내세우지 않는 하루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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