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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주말에 읽는 주역: 천수송 괘 (2)

280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8월 11일)

어제 읽지 않은 <천수 송> 괘의 괘사를 우선 공유한다. "訟(송)은 有孚(유부)나 窒(질)하야 惕(척)하니 中(중)은 吉(길)코 終(종)은 凶(흉)하니, 利見大人(이견대인)이오, 不利涉大川(불리섭대천)하니라"이다. '송(訟)은 믿음을 두나 막혀서 두려우니, 가운데 함은 길하고 마침까지 하면 흉하니, 대인을 봄이 이롭고, 큰 내를 건넘이 이롭지 않다'로 번역된다. TMI: 訟:송사할 송, 窒:막을 질, 惕:두려워할 척, 涉:건널 섭.  송사라는 것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에서 하게 된다. 특히 내괘(하괘)의 '구이(九二)'는 양효로 중(中)을 지키고 있고 초효와 삼효의 음에 비해 강함을 믿기 때문에 외괘에서 중정한 '구오'와 대적하게 된다. 그러나 내괘 자체가 '감 수(물) ☵'괘로 험하니 막혀서 두려운 상이다. 때문에 송사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중도에 그만 두면 길하지만, 끝까지 진행하게 되면 결국 흉하게 된다. 그러니 송사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인을 만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이롭다. 송사가 있는 상황에서 큰 일을 도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천수 송> 괘의 전체를 보면, 그 가운데 '지성진실(至誠眞實)'한 마음이 있다. "유부(有孚)"기 그런 것을 말한다. 하괘의 중심인 "구이"의 마음 자세가 그러하다. "구이"는 양의 위치에 양효로 자리하고, 중(中)까지 얻고 있다. 그러나 '초육'과 '육삼'의 자리가 모두 음요이며 그를 둘러싸고 질식키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정응(正應) 관계에 있어야 할 '구오'로부터 감응이 없다. 둘 다 양효가 되어 서로 감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구이'의 진실은 질식만 되어간다(窒,질). 이런 상황에서도 계구(戒懼)하는 자세로 두려워하고 신중히 행동하면 중도를 지키거나 도중에 적당히 송사를 취소해버리면 길(吉)하다(惕中吉, 척중길). 그런데 끝까지 갈 생각을 하면 흉하여 화를 입게 된다(終凶, 종흉). '상구'의 모습이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체를 공평하게 조명할 수 있는 대인을 만나, 그로 하여금 송사에 대한 판결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利見大人, 이견대인). 큰 강을 건너는 것 과도 같은 모험을 강행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不利涉大川, 불리섭대천).

단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彖曰(단왈) 訟(송)은 上剛下險(상강하험)하야 險而健(험이건)이 訟(송)이라. 訟有孚窒惕中吉(송유부질척중길)은 剛來而得中也(험내이득중야)오. 終凶(종흉)은 訟不可成也(송불가성야)오 利見大人(이견재인)은 尙中正也(상중정야)오. 利涉大川(이섭대천)은 入于淵也(입우연야)라." 이 말은 '단전에 말하였다. 송(訟)은 위는 강하고 아래는 험해서, 험하면서 굳건함이 송이다. ‘송유부질척중길’은 강이 와서 중을 얻음이요, ‘종흉’은 송사는 가히 이루지 못할 것이요, ‘이견대인’은 숭상함이 중정이요, ‘불리섭대천’은 연못에 들어감이다.” TMI: 尙:숭상할 상, 淵:못 연.

<천수송괘(天水訟卦)>의 외괘(상괘)는 '건천(乾天, ☰) 하늘' 괘로 강하고 내괘(하괘)는 '감수(坎水 ☵) 물 괘로 험한 상이듯이, 송사라는 것은 어떠한 유형이든 겉으로 강하게 대응하면서도 속으로는 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강한 것이 내괘에 와서 중(中)을 얻은 ‘구이(九二)’가 막히고 두려운 상황에서 중간에 그만 두면 길하지만, 끝까지 송사를 하게 되면 결국 상대인 '구오(九五)'를 이기지 못하니 흉하게 된다. 그러니 "대인을 만남이 이롭다"는 것은 송사에 조언해 줄 수 있거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를 만나라는 뜻이고, 또는 대적하고자 했던 '구오'가 중정(中正)한 덕을 지니고 있으니 '구오'를 숭상하거나 만나서 담판을 지으라는 뜻도 된다.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지 않다는 것"은 다툼이 있는 상황에서 큰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니, 내괘 '감수 ☵'의 못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그럼 지금부터 <천수 송> 괘의 <효사>와 <소상전>을 읽는다.

1. 가장 아래에 있는 음효인 "初六(초육)은 不永所事(불영소사)면 小有言(소유언)하나 終吉(종길)이리라"이다. 
이 말은 '초육은 일(송사)하는 바를 길게 하지 않으면, 조금 말이 있으나 마침내 길할 것이다'로 번역된다. TMI: 永:길 영, 終:마침내 종. <천수 송> 괘의 초효는 양자리에 음으로 있어 약한 상태이다. 모든 일이 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다툼의 상황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초육의 상황도 그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한때 대응하고자 하지만 길게 가지 않고 마치면, 약하다거나 의리가 없다거나 하는 등등의 말은 듣게 되지만 초육으로서는 마침내 길하게 된다. 초육이 변하면 음이 양으로 되면서 내괘가 '태택 ☱' 연못 괘가 되는데, 태(兌)는 소녀, 입, 말 등을 의미하니 조금 말이 있는 상황이 나온다. <소상전>은 이렇게 말한다. "象曰(상왈) 不永所事(불영소사)는 訟不可長也(송불가장야)니 雖小有言(유소유언)이나 其辯(기변)이 明也(명야)라." 이 말은  '상전에 말하였다. 일하는 바를 길게 하지 않음은 송사는 가히 오래하지 못하는 것이니, 비록 조금 말이 있으나 그 분별함이 밝은 것이다.” TMI: 雖:비록 수, 辯:분별할 변. '초육'의 상황에서 소송(분쟁)은 오래할 수 없다. 그래서 비록 조금 말이 있더라도 그 분별함을 밝게 해서 송사를 그친다.

좀 쉽게 말하면, 이 '초육'은 음효인데, 영의 자리에 있으니 제대로 된 자리가 아니다. 게다가 음효이니 힘이 없고 또 최하위이다. 이 효의 주인공의 쟁송dmf 끝까지 밀고 나갈 힘이 없다. 비단 쟁송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업을 창안해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나가 성공할 힘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不永所事(불영소사)"가 키워드이다. '하고자 하는 일을 길게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장기적인 투자를 하면 손해라는 뜻이다. 송사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송사라는 것을 길게 끌수록 손해라는 것이다. 단기간에 결판을 내거나 포기해버리거나 해야 한다. 중도에 하차하거나 빨리 일을 끝내거나 하면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잔말을 해댈 것이다(小有言, 소유언). 그러나 결국에는 길(吉)한 결과로 끝날 것이다(終吉,종길). 도올 김용옥 교수의 해석이다. 그러면서, 그는 "시비곡직(是非曲直)에 관한 쟁론은 오래 끌 것이 못된다"고 말했다.

2. "九二(구이)는 不克訟(불극송)이니 歸而逋(귀이포)하야 其邑人(기읍인)이 三百戶(삼백호)면 无眚(무생)하리라"가 아래에서 두 번째 효인 '구이'의 <효사>이이다. 
이 말을 해석하면, '구이는 송사를 이기지 못하니, 돌아가 도망하여 그 읍 사람이 300호면 재앙이 없을 것이다'이다. TMI:  克:이길 극,  歸:돌아갈 귀   逋:달아날 포,  邑:고을 읍,  戶:집 호,  眚:재앙 생. '구이'는 음의 자리에 양효로 있어 강한 것이 내괘의 중(中)을 얻고 있다. 또한 초효와 삼효가 모두 음효로 '구이' 양효에 대적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예컨대 지방 토호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구이'가 이러한 입지를 과신(過信)하여 외괘에서 중정(中正)한 '구오'와 대적하려고 하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도망하게 된다. 그런데 구이가 토호세력의 수장(首長)으로서 비록 '구오'와 대적하여 전쟁에서 졌을지라도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도망하지 않고 그를 여전히 받들면, '구오' 인군이 '구이'를 함부로 처벌하지 못한다. 그러니 '구오'로부터 형벌을 받는 재앙이 없게 된다. 그래서 ‘그 읍 사람이 300호면 재앙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不克訟(불극송)하야 歸逋竄也(귀포찬야)니 自下訟上(자하송상)이 患至 掇也(환지 철야)리라"이다. 이 말은 '상전에 말하였다. 송사를 이기지 못해서 돌아가 도망하여 숨으니, 아래로부터 위를 송사하는 것이 근심 이름을 취하는 것이다'로 번역된다. TMI: 竄:숨을 찬, 患:근심 환, 至:이를지, 掇:취할 철. '구이'가 결국은 송사에서 패하여 돌아가 도망하여 숨는 것은, 아래 사람으로서 위 사람을 송사하는 것이 분수에 지나친 과욕을 부려 재앙이 되는 근심을 취하는 것이라는 거다.

이 '구이'의 양효가 전체 <송괘>의 주체이며, 쟁송을 좋아하는 성격의 사나이이다. '구이'는 내괘의 중앙이기는 하지만, 음의 자리(位)에 있는 양효이니 정(정)을 얻고 있지 못하다. '구이'는 사실 상괘에 있는 '구오"를 믿고 송사를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구오'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득정득중(得正得中, 中正, 중정)의 큰 인물이다. '구이'와 '구오'는 모두 양효로 양강하여 감응하지 않는다. '구오'는 '구이'를 도울 생각이 없다. '구이'는 고립된다. 그리고 송사를 잘 이끌지 못한다(不克訟, 불극송). 결국 이 자는 도망쳐 숨을 수밖에 없다(歸而逋, 귀이포). 그런데 숨는 것이 큰 도시가 아니라, 삼백 호 정도 되는 작은 동네면(其邑人 三百戶, 기읍인 삼백호), 별로 드러나지 않을 떼니까, 크게 다칠 일이 없을 것이다(无眚, 무생).

3. 그 다음 "六三(육삼)은 食舊德(식구덕)하야 貞(정)하면 厲(려)하나 終吉(종길)이리니 或從王事(혹종왕사)하야 无成(무성)이로다"가 '육삼의 효사이다. 
이 말은 '육삼은 옛 덕을 먹어서 바르게 하면, 위태로우나 마침내 길할 것이니, 혹 왕의 일을 좇아서 이룸은 없다'로 번역된다. TMI: 舊:옛 구   厲:위태로울 려, 或:혹 혹, 從:좇을 종. '육삼'은 양자리에 음효로 있어 약하고, 내괘에서 외괘로 넘어가는 자리에 있으니 불안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구오' 천자로부터 작위(복록)를 받은 지방 제후로서 바르게 하면, 비록 강한 '구이'의 도전 때문에 위태롭더라도 '구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어 마침내 길하게 된다. 외호괘가 '손(巽) ☴' '바람' 괘이니 '육삼' 제후는 천자(인군)에 순응하여 보호를 받는 상이다. 그래서 때로는 '구오' 천자의 명을 받아 왕업을 수행할 수 있으나 스스로 그 일을 이룰 수는 없다. 여기에서 중지곤(重地坤) 괘의 '육삼' 효사  "六三(육삼)은 含章可貞(함장가정)이니 或從王事(혹종왕사)하야 无成有終(무성유종)이니라"는 내용을 같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육삼은 빛남을 머금어 가히 바르게 하니, 혹 왕의 일을 좇아서 이룸은 없되 마침은 있다'로 해석된다. 좀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아름다운 마음을 가슴에 품고 가히 바르게 왕을 위해 봉사하면 개인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수 있지만 공적인 일은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거다. 

여기서 '옛 덕을 먹는다(食舊德, 식구덕)'은 고대의 식읍(食邑)제도와 관련이 있다. 벼슬을 하는 사람에게 식읍을 내리면, 벼슬자는 그 식읍으로부터의 세수(稅收)로써 먹고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식읍은 세습된다. '옛덕(舊德)"이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식읍의 덕택으로 욕심 안 부리고 먹고 산다는 뜻으로 김용옥 교수는 풀이한다. '육삼'은 양위(陽位)에 있는 음효라 힘이 없고, 유순할 뿐이라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송사를 만들어 자기 운명을 개척할 능력이 없다. 그저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의 덕택으로 보수적으로 사는 것이 안전하다. 자신의 운명에 관해 점을 쳐도 위태로운 결론만 나온다(貞厲, 정려). 그렇지만 보수적으로 자기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자기 몸을 반듯하게 닦으면 끝내 좋은 운수를 만난다(終吉, 종길). 혹 왕사에 종사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或從王事, 혹종왕사). 이를 '정가(政家)에 진출한다'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성취도 없을 것이다(无成, 무성).

'육삼'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食舊德(식구덕)하니 從上(종상)이라도 吉也(길야)리라"이다. '상전에 말하였다. 옛 덕을 먹으니 위를 좇더라도 길할 것이다"라는 거다. '육삼' 지방 제후는 '구오' 천자로부터 복록을 받고 있으니, 천자의 뜻을 좇아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길할 것이다.

가능한 한 부딪치지 않고,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조용히 산다. 문제가 있더라도 부딪치고 s서는 것을 싫어하고,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이므로 공적인 일을 하더라도 큰 성과를 내진 못한다. 이런 식으로 <천수 송> 괘의 '육삼'처럼 살고 싶다. 오늘 사진은 매일 맨발 걷기를 하는 언덕에 핀 맥문동 꽃이다. 지금 한창이다. 그리고 <천수 송> 괘를 기억하며, 소환된 시가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다, 공유한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 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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