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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279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8월 2일)

인문학은 영어 humanities로,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교육 프로그램을 짤 때 원칙으로 삼았던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교양교육의 의미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 말은 미국 대학의 교양과정을 일컫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도 상통한다. 

서양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흔하지만 중요한 가치를 고취하는 교육과정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을 라틴어로 ‘트리비움(trivium)이라 불렀다. ‘트리비움’이란 축자적으로는 세 갈래(tri) 길(vium)이 만나는 ‘공공公共의 장소’ 혹은 ‘광장廣場’을 의미했다. 이 세 길 중 광장이 오늘 날 시장이다. 서양의 도시를 보면, 광장 옆에는 반드시 두 개의 건물이 있다. 하나는 교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법원과 시청이 있다. 교회는 이타심을 키우고, 시장은 이기심이 발동하는 곳이기에 이 공공 기관이 균형을 잡아주는 곳이다. 

이러한 광장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공공장소인 시장, 즉 ‘아고라’에서 나왔다. 그것이 고대 로마에는 다양한 공공의 의견을 교환하고 대화하는 ‘포럼(forum)'이 된다. 시민들은 이 광장에 모여,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정제된 생각을 개진하고, 최선의 생각에 승복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이러한 문화는 기억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찮은, 사소(些少)한’이란 의미를 지닌 ‘트리비얼(trivial)'은 라틴어 ‘트리비움(trivium)에서 유래했다. 로마인들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교육과정으로 만들어, ‘아르테스 리버랄리스(artes liberalis)'라고 불렀다. ‘리버랄리스’는 ‘자유로운’이란 의미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선별해 알고, 그 가치를 추하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연스럽고 의연한 사람, 즉 ‘자유인(自由人)’이다. 

‘자유’의 소극적인 의미는 탈출이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굴레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소극적인 자유는 자유가 지닌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 자유는 탈출이 아니라 열망이며 추구다. 자유는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자신의 개성을 최선으로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한 공동체를 다양하고 조화롭게 만들 역동적인 힘이다. 

‘아르테스’는 ‘최선, 예술, 기술’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르스(ars)'의 복수형이다. ‘아르스’는 하찮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솜씨가 있게 엮어내는 기술이다. 그 솜씨는 어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맛처럼,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경험이 만들어준 최적화된 간결이다.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여기서 출발하여,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교육이  ‘아르테스 리버랄리스(artes liberalis) 즉, ‘교양 교육’이 되었다. 이 '교양 교육'의 가장 기본이 ‘트리비움’이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지식이다. 너무 흔해 하찮게 보이지만, 공기처럼, 어머니의 사랑처럼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덕목들이다. 트리비움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민교육의 틀이며, 8세기말 프랑크 왕국의 카를대제(샤를마뉴)의 문화 장려교육을 통해, 오늘날 서양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나는 독립적인 인간인가? 무엇이 독립적인 인간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결국 독립국가를 만드는가? 트리비움을 구성하는 세 가지는 문법(文法), 논리(論理), 그리고 설득(說得)이란 무엇인가?
   
 '트리비움(trivium)은 철학, 아니 인문학을 하는 세 가지 길, 즉 문법학(文法學), 논리학(論理學), 설득(說得)을 위한 수사학(修辭學)을 의미한다. 
▪ 여기서 문법학은 철학서를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가 말하는 읽기와 문해 력을 키우는 일이다. 문해력은 배치를 파악하는 거다. 지각하는 법을 배우는 거다.
▪ 논리학은 철학서에서 터득한 철학자의 사고법을 도구 삼아 내 생각을 하는 것, 즉 내 논리를 만드는 것이다. 즉 생각, 아니 사유하는 법을 기르는 일이다.
▪ 수사학은 내 생각을 글로 쓰고 나누는 것이다. 즉 글쓰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글을 쓰되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 설득의 기술을 배우는 거다.

그리고  ‘트리비움’을 완수한 수련생은 그 다음 단계인 ‘콰드리비움’quadrivium, 즉 ‘네 과목’을 배운다. ‘시간’을 배우는 ‘산수(arithmetic), ‘공간’을 배우는 ‘기하학(geometry), ‘시간과 공간의 조화를 배우는 ‘음악(music), 그리고 ‘초월과 신’을 공부하는 ‘천문학(astronomy)이다. ‘트리비움’은 중등교육(초중고) 과정이고 ‘콰드리비움’은 고등교육(대학) 과정이다. 그네상스 시대에는 정신과 신체의 통합적인 완성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기존 7과목에 고어와 고문예를 더했다.

동양에서 인문학은 인문(人文), 즉 천문(天文), 지문(地文)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상과 문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인문학 하면 자연과학에 대립하는 영역이며 가치 탐구와 표현 활동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분류한다. 그러나 그보다 시야를 좁혀 문(문), 사(사), 철(철)이라고 간략하게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인문학은 학(學)을 빼고 '인문(人文)'하면 이해가 쉽다. 인문이란 말 그대로 하면 '인간의 무늬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말한다. 인문과 함께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천문(天文)-하늘이 그리는 무늬'이란 말이 있다. 그리고  '천지인(天地人)'을 생각한다면 '지문(地文)-땅이 그리는 무늬'라는 말도 사용할 수 있다.
 
천문과 지문은 '이(理)'가 지배한다면, '이'란 '옥돌에 새겨진 무늬'이다. 인간과 별 상관 없이 자연이 그리는 무늬인 것이다. 이에 비해 인문은 인간에게 새겨져 있고, 인간이 관여하는 무늬라면, 인문은 '이'보다는 '문'에 방점이 찍힌다. 인간은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무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도 하나의 큰 무늬, 커다란 결 위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 각자는 하나의 커다란 결속에서 움직이지만 각각 '다름'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인문이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근본적인 철학적 요소들과 인간 중심의 근원적인 사상을 다룬다. 그 이유는 좀 더 나은 삶, 지혜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만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인간끼리 잘 살자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힘든 처지에 놓인 그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고, 이런 것을 '인문 정신'이라고 한다. 요즈음 관심 받는 것도 관심을 주는 것도 꺼리는 각박한 요즈음,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이 인간들이 그리는 '인문 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지식, 즉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저 따뜻한 열린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 마음으로 생각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생각의 틀이란 세계관이다. 세계관이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다.

현재 우리는 이론이나 학술보다는 '진영'의 정치 공학이 우선이다. 이렇게 되면 진영만 바꾸는 일이 반복되고, 학술과 문화가 국가 운용과 별 상관 없이 존재한다. 삶과 지식이 분리되어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문학과 인문 정신이 따로 논다. 인문적 지식을 기능적인 이해의 대상으로만 삼지 내 삶에 충격을 주는 송곳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약하다. 높은 수준의 지식을 송곳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송곳이란 말을 하니까 사자성어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생각난다.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 속에 있어도 날카롭다는 뜻이다. 주머니 안에서도 들어 나는 것처럼, 인문 정신도 스스로 드러난다. 

흔히 인문학 하면, 문사철언예종(문학, 역사, 철학, 언어, 예술, 종교)를 말한다. 여기서 문학은 무엇을 선택할 까의 문제고,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할 까의 문제이고, 역사는 무엇을 한 것을 기록한 거다.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의 인문학이 피폐해진다면 인간은 언젠가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이다. 인문학의 죽음은 인류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관계의 망을 따뜻하게 보살피며, 과학과 기술의 한계를 직시하고, 부조리와 야만을 재판하며, 자본의 자기 파멸적 행위를 멈추게 하는 인문학이다. 그런 차원에서, 인문학은 '문사철'을 넘어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중요하다.

지식은 많으나 거기에 인간이 빠지고 인격이 매몰된 현실에 대한 반성을 위해 인문학을 회복해야 한다. 인간과 인격 그리고 교양을 회복하지 못하고 단순히 지식의 축적에만 매달리는 것은 인문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인문학은 지하수와 같다. 지하수는 지표에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하수가 없으면 수많은 생물의 생존이 위협받는다. 인문학에 대한 투자도 지하수의 수맥을 관리하고 개발하듯 해야 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투기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즉 다 돈으로만 바라본다면 인문학이라는 지하수는 말라버리고 만다.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내일 계속해서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를 이어갈 것이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오세영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사진도 오늘 시에 어울리는 것을 택했다. "노오랗게 타버린 가슴을 안고/나무는 나무끼리/풀잎은 풀잎끼리/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꽃은 꽃끼리. 우리는 어제 예술사랑 토파즈의 문예 창작분과 첫모임을 했다. 끼리끼리 시력을 되찾았다. 기타 연주아 노래, 아일랜드 탄 휘슬 연주, 각자 애송시 낭송 등 즐겁고 알찬 시간이었다.


8월/오세영

8월은 분별을 
일깨워 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맟춤 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 온 한낯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절망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나 홀로 태양을 안은 자는 
상처 입는다
쓰린 아픔속에서만
눈 뜨는 성숙
노오랗게 타버린 가슴을 안고
나무는 나무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비로소 시력을 되찾는다
8월은
태양이 왜
황도에만 머무는 것인가를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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