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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찬란한 빛은 그만큼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눈부신 빛 뒤편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찬란한 빛은 그만큼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다.

오늘은 8월 첫 일요일이다. 그래 오늘 아침도 매 일요일마다 만나는 짧지만 긴 여운의 글들을 공유한다. 인문운동가의 시선에 잡힌 인문정신을 고양시키는 글들이다. 그리고 이런 글들은 책을 한 권 읽은 것과 같다. 이런 글들은 나태하게 반복되는 깊은 잠에서 우리들을 깨어나도록 자극을 준다. 그리고 내 영혼에 물을 주며, 생각의 근육을 키워준다. 한 주간 모은 것들 중 매주 일요일 아침에 몇 가지 공유한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어제는 류영모 선생님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 나는 늘 왜 그의 호가 '많은 저녁, 다석(多夕)'일까 궁금했다. 하필이면 왜 저녁? 류 선생님에 의하면, 저녁에 어머니가 "애들아, 집에 오렴, 저녁 먹을 시간이야" 라고 부르는 이 소리는 신이 인간을 부르는 '저녁 콜'이라는 것이다. 이 '콜'은 신의 아이들인 인간을 부르는 따뜻한 소리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에게 저녁은 마음의 허기 뿐만 아니라, 몸의 피곤을 달래며 고요히 어둠으로 드는 시간이다. 따뜻하고 편안한 신이 호명하는 목소리의 시간이다. 그런 저녁이 많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저녁을 찬양하는 그의 어둠론은, 이 세상 밝음이 본질이 아니라, 어둠 이야말로 우주를 아우르는 거대한 품이라는 인식의 산물이다. 그래 그는 "세종석신(世終夕信)"이란 말을 했다. 목숨이 끝나면 저녁을 믿는 법, 저녁은 거룩의 냄새를 맡고 거룩과 가까이 하며 거룩을 닮아가는 시간이다. 그리고 "다석요식 영석불식, 多夕要息, 永夕不息)"이란 말을 했다. 생애의 많은 저녁엔 쉼(휴식)이 필요하지만, 영원한 저녁에는 숨(호흡)을 쉬지 않는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면, 살아있을 때의 저녁은 휴식을 주지만, 영원한 저녁은 숨쉬기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여기서 '다석(多夕)'이란 말이 나온다. 저녁은 어둠이 찾아오는 문턱이다.

언젠가 '저녁이 있는 삶'이 우리들의 화두였다. 나는 언젠가부터 저녁만은 딸과 꼭 먹으려고 노력한다. 저녁에 가족끼리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신이 부르는 따뜻한 소리를 듣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류선생님은 이런 말들을 우리에게 남기셨다.

"밝은 것이 있는 뒤에는 크게 잊어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어야 한다. 은연중에 통신으로 밤중에 희미한 빛으로 태양광선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혼과의 통신이다. (…) 묵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데 없다' 하였으니 처음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처음과 나중이 한 가지로 저녁이 로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낮은 밝아 세상이 눈에 보여 우리의 생각이 낮아지기 때문에 낮이라고 한다. 밤은 어두워 세상이 물러가고 먼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밤(바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정신의 근육이 퇴화된 것도 저녁이 있는 삶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도 장마는 있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를 읽으면, 일정한 세대 분들은 "그랬지" 할 것이다.
장마가 길어진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이어지는 장맛비로 마음까지 눅눅해 지는 날들이다. 개인적으로 촉촉한 것을 메마른 것보다 더 좋아하는 데, 장마가 길어지니 세상이 다 눅눅하다. 물론 덥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리 길어지니 한편 지루하기도 하다. 뜨거운 태양이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아침 사진은 지난 주에 다녀온 곳인데, 이번 주에 여기서 물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냥 들은 거라,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추정해 본 것이다.


장마의 추억/강정식

어릴 적 장마는 긴 기다림이다
물 새는 지붕과 벽면 곰팡이가
전장의 기념비 같은 커다란 지도를
상처처럼 남겨
고단하게 살아가던 궤적으로 쌓였다

우묵 배미 안마당
정강이 넘게 흙탕물이
문지방에 찰랑거릴 때쯤
붉은 기와 용마루에도 틈이 자라서
하늘이 보이고
천장을 적시며 영토를 넓혀가

물받이 그릇이
방 안 가득하던 시절에도
우리는 강가로 물 구경 갔다

1. 지난 화요일에 만난 글이다.
"눈부신 빛 뒤편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찬란한 빛은 그만큼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다. 압축적 경제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경제 양극화와 갈등적 노사관계라는 깊은 늪에도 빠지게 되었다. 지독했던 독재의 종결을 가져온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의 강렬한 빛 속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와 같이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에 필수적인 다른 이슈들이 시들어가고 있다." (이화여대 이주은 교수)

"우리 사회 보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언가 유용한 성과를 거둔 사람의 치명적인 과오에 무척이나 관대하다는 것이다. 반공이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친일 행적이나 독재에 비판적이지 않은 것처럼. (…) 친일과 성추행은 그 경중을 직접 비교하기 어려운 다른 종류의 과오이지만 그 발생 경로는 유사하다. 늘 살던 대로 사는 과정에서, 늘 하던 대로 하는 중에 저지르게 된다. 태어나 보니 일본이 통치하고 있었고 그 세력에 부역하면 큰 이득을, 부역하지 않으면 큰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에서 누구나 했던 것 아닌가. 나는 상대도 기대했을 법한 친밀함의 표현을 했을 뿐, 암묵적 관행으로 다들 그러고 사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친일 행적에는 관대하면서 성추행에는 비판적일 수 있는가. 어떻게 성추행에는 관대하면서 친일에는 비판적일 수 있는가." (이화여대 이주은 교수)

꼼꼼하게 읽으면,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늘 살던 대로 살고 하던 대로 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우라는 좀 다르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우리에게 숨겨진 무의식의 요소를 '그림자'로 설명한다. 외부에 공개되는 도덕적이고 선한 자아의식에 포함되지 못한 억압된 본능인 그림자는 우리가 이를 부정하고 억누를수록 더욱더 어둡고 위협적으로 변해간다. 따라서 우리 삶의 주요 과업은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통합을 통해 한 단계 더 진전하는 것이다. 그림자 원형은 개인에게만 존재하지 않고 집단적으로도 존재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밝은 빛 속으로 다시 끌어내는 것, 그래서 그 어두움과 용감하게 대면"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성 관련 문제가 현 집권 세력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것은 그 이전이나 또 다른 집단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바로 이 순간 피해자가 그동안 주어지지 않았던 발화의 기회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든 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듯, 그림자 역시 빛을 향해 다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말하지만, 우리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밝은 빛 속으로 다시 끄집어 내어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이다.

2. 수요일에는 한 문장만 만났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무히카 대통령) 물질적으로 넉넉해도, 시간이 없다면 '꽝'이다. 시간은 '나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냈다가, 힘들게 비웠던 그 시간이 가득 채워졌던 경험은 행복하다.

3.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 단 하나 공평한 게 있다면 모두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뿐이다.그럼에도 ‘노화’는 “꽃 피고 열매 열리면 낙엽 지는 거지”라고 쉽게, 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체감하는 노화는 쌓이는 시간의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방심한 사이 어느 순간 이뤄지는 종의 전환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나이듦이 실체적 현상이라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 자기감정”이라고 썼다. 외모, 건강 등 물리적 조건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환경 안에서 우리는 나이들기 때문이다. ‘언제나 마음은 청춘’이라고 매일 아침 복식호흡으로 외쳐도 “나이는 자기 마음대로 들지 않는다”. 그래 우리는 다 늙는다. 쫄지 말고, 할 수 있는 일 당당하게 하자. (한겨레 김은형 논설위원)

4. 목요일에 만난 글이다. "글 쓰기는 생각하는 노동이지요. 자신의 경험을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거듭 숙고하고, 모두의 성장을 희망하는 것. '너=나'우리'의 권력 관계를 고민하는 것, 저는 이러한 인간 행동이 '품위 있게' 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희진) '똑 부러지는' 문장이다.

5. 어제 저녁에, 내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권선필 교수의 담벼락에서 만난 글이다.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소유가 아니라 접근이 더 중요한 관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소유하고 있다고 다 향유할 수 있는게 아닌 것은 물론이고, 여전히 소유의 차이에 따른 격차와 차별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소유하게 해주면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방식이 기후변화나 생태환경문제에서 보듯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한계에 도달했음올 보여준다. '소유'의 방식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못할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부동산 문제에서 보듯이 부동산을 더 많이 더 크게 더 좋게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된다. 이 경우에도 '소유'가 아니라 '접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수 있다. '모든 국민이 동일하게 주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라고 하면 부동산 정책 방향이 명확하게 보인다. 청년들에게 어떻게 주거 접근성을 높일 것인가, 장애인 저소득층 고령자 등에게 주거 접근성을 어떻게 높여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정책과제라는 얘기다. 이들에게 접근성만 높여주는 방법을 고민해서 대책을 내 놓으면 부동산 가격 문제는 저절로 잡힐 것이다."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소유하게 되게 한다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그 방식은 기후변화나 생태 환경 문제에서 보듯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소유보다는 나눠 쓰고(공유), 바꿔 쓰고(교환), 다시 쓰는 (재활용)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도 모두에게 골고루 접근할 수 있게 하여 접근성을 높이는 길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과도한 생산을 불러오고, 과도한 생산이 바로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을 불러왔고, 결국 그것이 바로 기후 변화의 원인이 되는 순환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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