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1일)
좀 긴 글이지만, 삶의 방향을 주는 글이다. 한 권의 책이다. 우선 질문: 대전에서 서울까지 가장 빨리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 우리들의 인생 길도 마찬가지일 거다. 라피크(Rafik)는 "먼 길을 함께 할 동반자(同伴者)"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이다. 좋은 라피크는 서로 간에 모든 것을 공감하며,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역지사지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동반자를 찾는 길은 나 스스로 먼저 '좋은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런 동반자를 찾고 있는 중이다.
오늘이 벌써 8월이 시작되는 날이다. 코로나-19 4차 유행으로 거리두기 4단계로 6시 이후에는 2인 이상 집합금지이다. 게다가 불볕 더위이다. 숨이 확확 막힌다. 다들 집에서 에어컨을 켜고 있으니, 실외기 때문에 밖은 더 덥다. 지구만 괴롭다. 그러니 악순환이다. 지구가 가만히 있지 않다. 보복하고 있다. 여름인데,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 더 덥다.
그대로 우주의 로고스(원리)는 변하지 않고 있다. 그걸 "씨앗의 법칙"이라 한다. Yoon-hyeong Lee라는 담벼락에서 읽었다. 좀 정리를 해서 공유한다. 나 자신에게도 삶의 지혜가 되었다. 씨앗의 법칙은 6가지였다. 주말농장을 하면서, 오래 농사를 지어봐서 더 잘 이해가 되었다.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거두려면 먼저 씨를 먼저 뿌려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삶의 지혜가 나온다. 일상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원인을 지어야 결과가 생기는 인과응보의 법칙도 이와 같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는 법이다. 무언가 이루고 싶다면 우선 시작을 해야 한다. 집을 2층부터 짓는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밭을 갈지 않고 심으면 싹이 나도 뿌리를 내리기 힘들고, 싹이 난 후에 밭을 갈려고 하면 뿌리를 다칠까 손대기 어렵다. 그러니 모든 일에는 차서(次序)가 있다. 어제도 이 이야기를 했지만, 난 차서라는 말을 좋아한다. 차서의 다른 말이 목차인데, 좀 엄밀하게 말하면, 차례(次例)와 질서(秩序)가 합쳐진 말이다. 순서 있게 벌여 나가는 관계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서 돌아오는 기회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개념이다. 그 차서를 모르면 성과가 없고 일이 꼬인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상대에게 필요한 것과 제공 시기 및 방법을 파악하고, 기다려야 한다. 씨를 뿌린 것도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씨앗도 뿌린 후 곧 바로 거둘 수 는 없다. 무슨 일이든 시작했다고 해서 즉각 그 결과가 있기는 기대하지 말고, 차서를 지키며 인내하며 계속 하여야 한다. 차서를 지키며 꾸준하게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면, 꾸준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3) 뿌린 씨가 다 열매가 될 수 없다. 씨앗 10개를 뿌렸다고 10개 모두를 수확할 수 없다. 그러니 모든 일에 성공만 있기를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철학자 강신주에 의하면, 살다 보면 모든 사람이 3:4:3으로 나뉜다고 한다. 내 편 3, 중도 4, 죽었다 깨어나도 나랑 안 맞는 사람 3. 그 중에 4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3때문에 마음 아파할 것은 없다. 사는 것은 '한 방', '대박'이 아니다. 점진적으로 익어가는 것이다. 만날수록 삶을 더 즐겁게, 더 만족스럽게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내가 당신 때문에 인생이 더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4)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못해도 결국 뿌린 것 보다는 많이 거둔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너무 이해타산에 급급해 할 필요 없다. 인생은 길게 그리고 크게 보아야 한다.
(5)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의 통찰을 얻는다. 자연은 스스로 보여줄 뿐 말은 하지 않는다. "천하언재(天何言哉)!" 하늘이 언제 말하더냐! 오직 부산한 인간만이 말로써 세상을 재단하고 어지른다. 우리는 여기서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우주의 법칙을 배운다. 선을 행하면, 상으로 돌아오고, 악을 행하면 벌로 돌아온다. 이를 인과으보라 한다. 어떤 이는 악을 행하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까지 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이왕에 씨앗을 심으려거든 귀하고 좋은 씨를 가려서 심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세상에 우익한 것을 심는 것이다.
어쨌든 우주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 낸 영원한 메트릭스라면, 그 메트릭스를 운행하는 원칙은 인과응보이다. 우주는 원인과 그것에 적당한 결과라는 영원한 원칙의 작동 안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인과의 명백하고 정당한 관계를 정의라고 부른다. 우주의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정교한 관계 속에서 완벽한 조화를 통해 유지된다. 우주 안 만물들은 인과의 절묘한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조정한다. 이 조화가 무너지면 혼돈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인과원칙을 통해 생성되었고, 인간의 생각, 말, 그리고 행위도, 그것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이 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그 결과까지는 선택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것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지만, 그 생각과 행동의 결과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그 결과는 원인의 당연하고도 엄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6) 종자는 남겨두어야 한다. 수확한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두어야 한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종자가 되는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씨 과일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의 세월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일궈 나가는 변화의 힘이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 때가 있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간파를 하고,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고 신영복 교수님이 늘 말씀하시던 '석과불식'이라는 사자성어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소환하여 공유한다.
아주아주 오래전 어떤 여객선이 항해를 하다 큰 폭풍을 만나 난파되어 항로를 잃고 바람 따라 헤매다 어느 무인도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도 승객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으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배에 몇달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곡식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얼마를 기다려야 구조를 받을지 알 수 없어 승객들은 논의 끝에 미래를 위하여 땅에 씨앗을 심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씨앗을 심기 위해서 땅을 파자 땅에 황금덩이가 여기저기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땅을 파 뒤지기만 하면 황금덩어리가 나타나자 승객들은 씨앗을 심는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황금덩어리가 나오는 판에 구태여 귀찮게 씨앗을 심는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씨앗을 심는 일에 관심이 없어진 것과 비례하여 황금은 점점 많아져 더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몇달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식량이 서서히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이들은 씨앗을 심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먹을 식량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씨앗을 심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려면 또 몇달을 기다려야만 하는데 그때까지 먹을 식량이 없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이미 때는 놓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나 무인도를 방문한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황금덩이와 죽은 사람들의 백골 무더기들 뿐 이었습니다. 먼저해야 할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황금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 어리석은 일은 없었는지 나 자신을 뒤돌아 봅니다. 우리의 소중한 삶의 시간에 황금 덩이만을 찾아 헤맬 것인지, 아니면 씨앗을 심을 것 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글이 좀 길지만, 고 신영복 교수의 다음 글은 나를 이제까지 키워준 힘이었다. 언제든지 꺼내 읽곤 한다. 그의 글을 다시 불러왔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언어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이다.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에 있는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절망을 희망으로 일구어 내는 보석 같은 금언이다. 석과불식의 뜻은 ‘석과는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과는 가지 끝에 남아 있는 최후의 ‘씨 과실’이다. 초겨울 삭풍 속의 씨과실은 역경과 고난의 상징이다. 고난과 역경에 대한 희망의 언어가 바로 석과불식이다. 씨과실을 먹지 않고(不食) 땅에 심는 것이다. 땅에 심어 새싹으로 키워내고 다시 나무로, 숲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다. 이것은 절망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길어 올린 옛사람들의 오래된 지혜이고 의지이다. 그런 점에서 석과불식은 단지 한 알의 씨앗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 키워야 할 희망에 관한 철학이다."
그는 석과불식에서 정치의 원칙을 찾아 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의 삶의 원칙이라고 본다. 고 신영복 교수는 석과불식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교훈을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보았다. 첫째 엽락(葉落), 둘째 체로(體露), 셋째 분본(糞本)이다.
(1) ‘엽락(葉落)’은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거품과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거품과 환상은 우리를 한없이 목마르게 한다. 진실을 외면하게 하고 스스로를 욕망의 노예로 만든다. (…)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소유는 끝이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사람,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도 못 된다. 먼저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하는 엽락의 엄중함이 이와 같다.
(2) ‘체로(體露)’는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나무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다. 뼈 대란 그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이를테면 정치적 자주(自主), 경제적 자립(自立), 문화적 자부(自負)이다. 정치적 자주는 우리의 삶에 대한 주체적 결정권의 문제이다. 경제적 자립은 위기를 반복하고 있는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 그 파고를 견딜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 놓고 있는가를 직시하는 것이다. 경제적 자립기반이 튼튼할 때 비로소 정치적 자주가 가능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문화적 자부는 우리의 문화가 우리들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자부심을 안겨주는 것인가를 직시하는 것이다. 자부심 이야말로 역경을 견디는 힘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자립, 자부, 즉 '3자(自)'를 늘 기억한다.
엽락과 체로의 교훈은 한마디로 환상과 거품에 가려져 있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삶의 근본을 마주하는 것이다. 포획되고 길들여진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과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일이다.
엽락과 체로에서 나무는 자기 삶의 순서에서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겨울에 부족한 햇살과 수분 그리고 영양분을 가지와 줄기에 집중하여 간결한 알맞음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체로는 마침내 생을 헐벗은 가슴으로 존재를 우주 허공에 내던지는 멋진 포즈가 된다. 햇살과 바람은, 나뭇잎의 수식에 가려지지 않고 몸뚱이와 직면하여 대화를 나눈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금풍은 오행의 금(金)에 해당하는 것이 가을이기에 금품은 가을바람인 셈이다. 금풍에 제 몸을 드러내는 일은 축복이다. 살아서 모든 것을 가리고 숨기고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채 살아가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가려져 상상만 했던 것들의 실체와 진실을 읽으며 내면을 단단하고 튼길하게 키우는 때가 체로이다.
(3) ‘분본(糞本)’은 나무의 뿌리(本)를 거름(糞)하는 일이다. 엽락(葉落)과 체로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분본이다. 무엇이 본(本)이며, 무엇이 뿌리인가에 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역사를 지탱하는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놀랍게도 뿌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던 언어, ‘사람’이 모든 것의 뿌리이다.
다르게 말하면, 본분(糞本)은 뿌리(本)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뿌리가 접히지 않고 바르게 펴질 때 나무가 잘 자라고 아름답게 꽃피듯이 사람이 억압되지 않을 때 우람한 나무처럼 사회는 그 역량이 극대화되고 사람들은 아름답게 꽃핀다. (…) 우리의 현실은 사람을 키우기보다는 수많은 사람을 잉여인간으로 낭비하고 있으며 심지어 사람을 다른 어떤 것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까지 하다. 이제는 사람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키우는 일 자체가 불편하고 불필요한 것이 되어 있다. 직접 만들거나 키우지 않고, 우리는 모든 것을 구입한다. 필요할 때에만, 그리고 잠시 동안만 구입한다. 사람도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석과불식이라는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삶의 지혜가 이어진다. 깊은 통찰력이다. 7월을 마감하는 날 이 글을 다시 읽고, 공유하게 되어 마음이 평화롭다. 먼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잊지 말고 챙겨야 할 몇 가지 채비가 있다.
(1) ‘길’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길은 도로와 다르다. 도로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속도와 효율이 그 본질이다. 그에 반하여 길은 그 자체가 곧 삶이다. 더디더라도 삶 그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하는 긴 호흡과 느긋한 걸음걸이가 길의 마음이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한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위하는 모든 삶이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2)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동반자이다. 고생길도 함께할 수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대단히 불행하다. 신뢰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비단 정치 영역 뿐만 아니라 신뢰집단이 없기는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언론, 사법 등 사회의 모든 분야도 다르지 않다.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가 없다면 길은 더욱 아득하고 암담할 수밖에 없다.
(3) 그리고 먼 길은 ‘여럿이 함께’ 가야 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공존(共存)의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모든 입장과 이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는 우리가 함께 통과해 온 현대사의 애환이 고스란히 공유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 또 소통해야 하는 것이다.
(4) 마지막으로 변화(變化)이다. 진정한 화(和)는 화(化)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막히면 변화해야 하고, 변화하면 소통하게 되고, 소통하면 그 생명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변화의 의지가 없는 모든 대화는 소통이 아니며, 또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소통이란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상대방을 타자화하고 자기를 관철하려는 동일성 논리이며 본질적으로 ‘소탕’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하다. 더구나 함께할 동반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반자는 나 자신이 먼저 좋은 동반자가 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원칙과 근본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은 신영복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역경을 견디는 자세이다.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이며, 날마다 갱신하는 삶을 살아가자는 의미다. ‘함께’와 맥이 바로 통하는 글이 ‘절반(折半)과 동반(同伴)’이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이다. 반(半)은 어떤 것의 절반을 의미하는 동시에 양쪽의 두 대상이 공존하며 함께 나아가는 동반의 의미가 담겨있다. 피아노는 흰색 건반인 온음과 그 온음 사이 검은색 건반인 반음의 조화와 화음으로 연주된다. 아름다운 음악은 그렇게 연주되어 야만 가능하다.
절반과 동반/신영복
피아노의 건반은 우리에게 반음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동반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습니다.
'절반의 비탄'은 '절반의 환희'와 같은 것이며,
'절반의 패배'는 '절반의 승리'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對敵)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동반’의 의미에 주목하여,절반이 승리하면 남은 절반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남과 북, 여와 야 등 모든 갈등과 대립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희망의 반대편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한쪽이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는 관계가 아니라 협력과 조화의 관계임을 말한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이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이 더욱 그리워지는 법이다. 진정한 연대의 의미도 그것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칼날 같은 우리의 관계를 되돌아보며 동락(同樂)의 경지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권순진 시인의 덧붙임도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핟_신성마을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석과불식 #엽락 #체로 #본분 #체로금풍 #라피크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0) | 2024.08.02 |
|---|---|
| 인문학은 "매일 힘이 되는 진짜 공부"이다. (0) | 2024.08.01 |
| 돈키호테는 제정신을 되찾자 죽는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돈키호테는 아직도 살아 있다. (0) | 2024.08.01 |
| 덥고, 뜨거워도 시간은 흐른다. (0) | 2024.08.01 |
| 생생한 만남은 우리에게 둔탁한 충돌이 가져다 주지 못하는 어떤 것을 제공한다. (1) | 2024.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