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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난 8월 1일을 싫어한다. 어린 시절에 다리를 크게 다친 날이었고, 아내가 하늘 나라로 먼저 간 날이기 때문이다. 그 때도 요즘처럼 날이 뜨거웠다. 별 일 없이 하루를 보냈는데, 사단이 난 것은 저녁이었다. 반가운 친구들이 좋은 와인들을 가지고 와, '신나게' 마셨다. 낮에 잘 참았던 슬픔이 몰려 와, '주님'과 함께 죽었다. 오후가 되어 겨우 부활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결정을 했다는 외신이 나왔다. "역사에 지름길은 있어도 생략은 없다는 말이 있다.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다. 이 참에 일본을 넘자.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새로운 것들은 다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을 생산해서 나아가고 싶다면 먼저 불편함의 문제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야 한다. 기계나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게 가장 수준 높은 일 가운데 하나가 불편함을 느끼고 문제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의 문제를 발견할 때 인간이 하는 최초의 지적 활동이 질문이다. 반면,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를 숙지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의 지적 활동을 대부분 대답으로 채운다.*

어떤 물건이나 제도나 사상이거나 간에 옳다는 이유로 선하다는 이유로 등장한 것은 없고, 문제나 불편함을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나올 뿐이라는 점이다. 미래로 나아가려면, 질문을 해야 한다. 미래를 여는 지적 활동은 질문이다. 질문은 언제 나오는가? 질문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다. 최진석 교수가 내린 정의이다. 학자들은 책상에 앉아 관념적으로 정의는 잘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 책상 밖으로 나와 세상을 체험하지 않는다. 그러면 호기심과 궁금증이 나오겠는가? 사유와 체험의 조화 속에서 궁금증과 호기심이 나와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이 세계의 어느 누구 와도 공유되지 않는, 자기에게만 있는 매우 비밀스럽고 사적인 것이 된다. 문제는 질문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자들의 고질적인 병이다.

질문하는 인간, 즉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동하는 인간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을 근거로 활동하기 때문에 독립적 주체라는 호칭을 얻는다. 세계를 앞서서 이끄는 선도자 역할은 다 이런 독립적 주체들이 독점한다. 스티브 잡스가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와 시대의 문제가 일치한다. 그런 일치는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고 생을 찬미하는 플라톤의 에로스(숭고한 사랑)가 먼저 있어야 한다.

다 안다. 문제는 행동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미 있는 것을 밟고 서서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 아직 해석되지 않은 것을 알거나 가지려고 도모하는 일이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확장적이며, 미래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동사적인' 삶이다. 그 반대인 사람들은 자신만의 사적인 일이 있으면, 자신이 가꾸려는 커뮤니티에 희생하지 않는다. 공(公)과 사(私) 중에서 자신이 리더라면, 공(公)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겨야 한다. 그게 윤리이다. 모든 발전은 현재의 다음 단계를 궁금해 하고 꿈꾸다가 거기에 몰입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 점은 동의한다. 이념에 갇히면 사고력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사고력 저하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보수 기득권들이 문제이다. 그들이 너무 쉽게 살았다. 이젠 우리의 힘으로 다음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 예컨대, 진정한 반도체 강국이 되려면, 쉽게 원자재를 사다가 쉽게 제조하는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려면 재벌의 힘을 빼고 중소기업을 키워야 한다. 경제의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고시(高試)를 없애고, 관료체계를 혁신해야 한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_시하나 #류시화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

PS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뱉아내는 일이다. 이때 가장 중시되는 일은 누가 더 빨리, 누가 더 많이,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아내는가 이다. 예컨대, 대답이라는 활동이 가장 높은 단계에서 제도적으로 운용된 것이 고시(高試)일 것이다. 여기서 '원래 모습'이란 말이 가장 큰 문제이다. '원래 모습대로'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과거를 어루만지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살게 된다. 또 '원래 모습'은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기준이 작동하면 선악 논쟁이 된다. 기준에 맞으면 선이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악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진위(眞僞) 논쟁을 한다. 오구라 기조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명분에 죽고 산다. 우리가 이렇게 도덕, 철학 등 명분에 갇힌 이유도 질문보다는 대답에 익숙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래 모습'이 기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원래 모습'이 기준으로 작동하여 그것에 맞으면 참(眞)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僞)이다.

당연히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야 자리를 쉽게 차지 하기 때문이다. 나처럼, 모든 권위, 기준에 저항하는 것에 몸이 밴, 재야 인문운동가들의 말은 듣지 않는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로 채워진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들은 '옳으냐, 그르냐'를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고 따지는 진위(眞僞) 논쟁으로 흐른다. 기준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놓는다. 각자 자기만의 정의에 갇혀서 상대방을 적대시하며 극단적인 분열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런 이유이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이 진위 논쟁이자, 선악 논쟁이며, 총체적으로 과거 논쟁인 이유는 우리가 대답으로만 양성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