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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생에는 지우개가 없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요즈음 거리를 다니다 보면, 향과 함께 예쁘게 핀 치자 꽃들을 잘 만난다. 그 때마다,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가 생각나 공연히 슬프다. 향은 우리에게 잊고 지내던 어떤 기억을 쉽게 불러낸다. "사랑하는 일이야말로/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습니다/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습니다."

주말은 두꺼운『돈키호테』를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눈이 아플 정도였다. 매번 읽을 때마다, 나는 노련한 익살꾼, 세르반테스에게 감탄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모질고 혹독하고 음험한 손길에서 빠져 나오기 위하여, 갈릴레오처럼 자신이 말한 진실을 거짓이라 고백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고, 자기가 쓴 글이 검열에 걸려 화형에 처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취한 그의 글쓰기 자세를 나는 배우고 싶다. 연구자들은 그를  "영웅적인 위선자", "노련한 위선자"라고 표현했다.

생각하면 다치는 세상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 대신, 세르반테스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감 감춘다'라고 해야 했고, 더 나아가 단지 생각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 '나는 쓴다. 고로 나는 감춘다'를 잘 보여주었다. 여기서 돈키호테의 '나'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나'와는 다른 행동하는 '나'이다. '나는 행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돈키호테는 행위로 자신을 창조하고 실현해 가는 의지의 인간이다.

그러니까 삶에서 충만함을 얻는 길은 뭔가 내 삶에 가치 있는 일을 행동으로 옮길 때 이루어진다.  삶에 대한 큰 질문을 하며 얻은 답은 결국 답은 생각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나의 모든 행위 안에 구해야 한다.  삶을 산다는 것은 지식, 잠시 기억하는 남의 생각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나의 의지로 행동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지우개가 없다. 인생은 일방 통행이다. 한번가면 뒤돌아 볼 수는 있지만, 되돌아 갈수는 없다. 그래 사랑은 참 어렵다. 받아도, 받아도 또 받고 싶은 게 사랑이다. 그렇지만 받은 만큼 나누는 사랑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더 좋을 듯 싶다. 추억이 되어버린 사랑은 그리움으로 꺼내서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처럼 정열적인  사랑으로 그리움이 아닌 기억속의 사진첩을 아름답게 꾸며 가고 싶다. 치자 꽃 향기처럼, 설화(說話, 구전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치자 꽃 설화/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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