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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세련되게 겸손 하려면 비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건전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272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22일)

지난 주말에는 마티아스 뉠케의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를 읽었다. 세상이 아무리 폭풍 같아도 고요히 자기 중심을 잡고 바로 서있는 사람, 모두 자기를 내세우느라 떠들썩한 세상에서 묵묵히 겸손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 말로 가장 현명하고, 가장 강한 사람으로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이 책을 읽었다. 이런 사람은 누구도 상처주지 않으면서 결국 모두를 이긴다는 거다. 

그리고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문장이 좋았다. 세련되게 겸손 하려면 비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건전한 자존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타인의 판단에 의지하거나 좌우되지 않아도, 타인의 인정 없어도 자기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한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한 사람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는 태도, 여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한 방법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걸 믿는 거다.

"겸손하면 손해 본다"는 주장에 대해, "겸손이야말로 자신감을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이고 배려 깊은 태도"라고 말하면서, 이 책은 "절제된 행동과 겸손한 태도"가 발휘하는 힘을 잘 보여준다. 겸손함한 태도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공손함
-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예의를 잃지 않는 정중함
- 상황을 경솔하게 판단하지 않고 담담하고 점잖게 대할 줄 아는 신중함 

나는 노자 <<도덕경>> 제66장에 나오는 "선하(善下)"라 말도 좋아한다. '상대방 밑에 자신을 둘 줄 아는 거'다. "부쟁의 지혜"이다. 나는 이 보다는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그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겸양지덕'과 단순히 "부쟁(不爭, 싸우지 않음)"을 넘어서는 다양한 리더의 철학으로 읽었다. "부쟁"은 성공한 자의 신의 한 수라는 거다. "선하"는 과정이고 그 결과가 부쟁으로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강(江)과 바다(海)가 깊고 넒은 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아래로(下) 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골짜기(百谷)의 물이 그 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노자는 '부쟁의 철학'을 주장한다. 상대방과 나의 손실 없이 부드럽게 이기는 방법이 노자가 원하는 승리 방법이다. 이를 박재희 교수는 "노자의 유약 승리법"이라 했다. 씨우지 않고 상대방의 가슴에 못박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다. 이것이 또한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얘기하면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절제된 말과 행동이 오히려 더 강력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모든 게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세상에서는 고요함, 소박함, 평온함이 그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 일상에 이 세 가지, 고요함, 소박함, 평온함을 되찾아 늘 유지하고 싶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껏 과장해서 떠드느라 바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비로소 실감한다. 다음 세 가지를 갖춘 겸손의 미덕이 야말로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가치라고 본다.

(1) 고요함: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 여겨 봅니다라는 노자 <<도덕경>> 제16장에 나오는,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말을 좋아한다. "치허극 수정독"은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쉽게 말해, '비워야 채워지고, 고요해야 움직일 수 있다'는 거다. 비쁜 날들이 계속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이젠 문장 구조를 알겠다. "치허'를 지극하게 하고, '수정'을 돈독하게 하라는 것으로 읽는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이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이다. 이 말은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란 뜻이다.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를 거기서 본다'로 읽는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되돌아 감"을 나는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라 한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너무 나를 소모하지 말자. 그리고 내 일상을 비우고 고요하게 만들자. 그러면서 '되돌아가는'를 때를 기다린다. 때는 기다리면 온다.

(2) 소박함: 최근에 늘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 노자 <<도덕경>> 제19장에 나오는 "견소포박, 소사과욕(見素包樸, 少私寡慾)"이다. 이 말은 '순결한 흰 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아라!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란 뜻이다. 좀 더 자세하게 풀면, 물들이지 않은 무명천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라는 것이다. '질박함'이란 먹는 것은 기름지고 걸쭉하고 느끼한 것이 아니라, 덜 가공한 담백하고 소박한 음식이고, 옷은 요란한 색상이나 과장된 디자인은 피하고, 질박하고 수수한 디자인을 찾는다. 몸에 편하게 입는다. 미끈하고 반짝거리고 화려하고 화끈함은 물건이건 인간 관계이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노자가 '무사무욕(無私無欲)'을 말하지 않고, '소사과욕(少私寡欲)'의 현실적 처방을 한 것이 인상적이다. '소'와 '과'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일정한 눈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적게 하고 끊임없이 줄이는 역동적인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올이 말하는, "우리의 몸의 살을 빼는 것도 끊임없이 줄이는 것"이 멋진 예이다.

(3) 평온함: 마음이 평온하고 자신만의 방향과 정신이 있다면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심이 생긴다. 독립심은 타인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배를 조종하는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거다. 닻으로 굳건하게 중심을 잡고 있으면 외적인 감정에 함부로 휘둘리지 않고 억지로 변하려 하지도 않아서 진정으로 나-다움을 느낄 수 있다. 평온한 마음은 나약함이 아닌 '자신감'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감이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나 자신이다.  나만의 커렌시어를 가는 것이 중요하다. 스페인어 '커렌시아(Querencia)'는 평온한 곳, 안식처, 휴식처 등을 뜻한다. 이 단어는 투우장의 탈진한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숨을 고르기 위해 찾아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복잡한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자기만의 힐링 공간을 두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잠시 온전한 쉼의 여유를 얻는 곳이다. 현대인의 그러한 공간이 바로 커렌시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신적으로 만드는 궁극적인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는 벼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부화뇌동 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몰입하는 마음, '평온(平穩)'이다."(배철현) 편안하고 평온은 뉘앙스(nuance, 미묘한 차이)가 있다. 평안과 달리, '평온'에는 의심, 공포, 걱정, 근심,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온한 인간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조용한 희열에 휩싸여 있다. 매일 외부에서 눈과 귀를 통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평온을 유지할 능력이 있다면, 그는 이미 천국을 지금-여기에서 구현한 자다.  평안은 일시적인 상태라면, 평온은 지속적인 상태 같다. 평온의 사전적 해석이 "조용하고 평안함"이다. 

어쨌든 이 능력을 가꾸고 신장시키는 훈련은 쉽지 않다. 곳곳에 평온을 흔들려는 적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와 부러움, 욕망, 식탐, 분노를 일으키는 잡담들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부여잡고 평온을 실천하는 것은 거의 신적인 경지다. 중심 자리를 타인에게 넘겨주면, 인간은 초라 해져 주변으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들로 무장한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구원할 가장 유용한 도움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의 도움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이다.

고요, 소박 그리고 평온을 떠올리면, 이해인 수녀님의 다음 시가 소환된다. 사진은 저녁 식사 후 맨발 걷기를 하다 만난 반달이다. 교요하고, 소박하고 평온한 하늘이었고, "저 만치서 행복이/웃으며 걸어왔다."


어떤 결심/이해인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 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아플 때
한 순간 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을
들여다 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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