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16일)
오늘은 20번 <관괘(觀卦)>를 가지고, 각 괘가 어떤 짜임세를 지니고 있는지 실제로 살펴본다.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8가지 자연물(하늘, 땅, 물, 불. 산, 연못, 바람, 우레) 중 두 가지가 서로 만나 만들어 내는 것을 괘상(卦象)이라 한다. 상괘는 바람이고, 하괘는 땅이다. 땅이 아래에 있고 바람이 위에 있다는 뜻이다. 이 상은 '땅 위를 쓸고 가는 바람(風行地上, 풍행지상)'이다.
다음은 '괘명(卦名)'이다. <관괘>의 괘명은 '관(觀, 바라봄)'이다. ‘관(觀)’자는 황새(雚)가 비상하여 천하를 보는(見) 상을 취한 것이다.
다음은 괘 전체에 대한 줄거리가 나온다. 큰 줄거리를 '괘사(卦辭)'라고 하고, 상세한 줄거리를 '효사(爻辭)'라고 한다. 괘사는 다음과 같다.
"觀은 盥而不薦이면 有孚하야 顒若하리라."
관 관이불천 유부 옹약
관(觀)은 세수를 하고 천신하지 않으면, 믿음을 두어서 우러러 볼 것이다.
觀:볼 관 盥:대야 관·씻을 관 薦:올릴 천·천거할 천 顒:엄숙할 옹·우러러볼 옹·공격할 옹
도올 김용옥 교수는 여기서 '관'을 단순히 본다는 의미보다, '신의 의지를 살핀다'로 보았다. "관이불천"에서 "관"이란 제사를 지낼 때 제주가 손을 씻는 모습이라 한다. 주역의 정신은 모든 것이 관계적이다. 내려다 보는 사람의 시선은 올려다 사람의 시선과 "유뷰옹약(有孚顒若)"하게 감응해야 하는 것이다. "유부옹약"은 '관'의 주체의 성실함이 가득 차, 옹약하여 만인의 존경심을 얻는다는 거다.
<관괘>는 세상과 운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주제이다. 왜 바람이 바라봄과 연결될까? 바람은 바라봄에서 나온 말인가? 경치를 볼 때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에 보아야 시야가 트이고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바람은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또한 바람은 세상 구석구석 어디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옛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온 세상 구석구석 두루 훑고 지나가는 바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을 가장 잘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바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땅 위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바라봄' 괘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관괘>에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문제도 나오지만, 거꾸로 내가 어떻게 보이는 가 하는 문제도 나온다. <<주역>>은 서로 다른 관점의 이야기가 섞인 경우가 흔하다.
<관괘>의 '괘사'를 현대어 옮기면, '제사를 드릴 때 손을 씻고 난 직후, 아직 제물을 바치기 전, 처음 시작할 때의 경건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미더움이 있어서 바라보는 이들이 마음을 다해 우러러볼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제사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요점은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대한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라는 거다. 제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손을 씻는 의식을 한다. 이때는 누구나 매우 진지하게 제사에 임한다. 손 씻는 의식은 초심의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제사인지 잊어먹고, 잡념과 잡담에 빠진다. 만약 내가 지금 하는 일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게 초심을 잃지 않고 실천한다면 세상도 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 리 없다. <관괘>의 '괘사'가 하려는 이야기 아닐까?
기원후 2세기 벤 조마는 <<탈무드>>를 해석한 <선조들의 어록> 4.1에서 우주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원칙 때문에 유지된다고 했다.
▪ 토라(torah): '율법 경전'이면서 '길'이란 의미이다. '경전'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면, 우리는 '경전'을 읽어야 한다. 여기서 '길'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도(道)'와 같은 것 같다. 배철현 교수는 '길'에 대해 두가지를 덧붙인다. (1)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기에게 유일하고, 자신만의, 즉 자기 삶을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매 순간 발걸음이 닿는 길이 바로 자신의 '목적지'라고 인식하며,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2) 종교적인 '죄'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안다 할지라도 그 길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라고 한다.
▪ 아보다(avodah): '노동'이면서 '예배'란 의미이다. 이 단어도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노동', 아니 자신이 하는 일이 신에 대한 경배로써 '예배'란 의미이다. 그래서 히브리어 '아보다'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서비스(service)라 한다. '아보다'는 다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이웃이나 낯선 자를 위해 하는 일이나 노동(서비스)은 바로 신에게 하는 것과 같다. (2) 자신이 하는 일을 신을 위해 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삶의 원칙이 되기도 한다. (3) 서비스라는 말은 낯선 자를 신처럼 섬기라는 윤리적 명령이기도 하다. 일이 신에게 드리는 예배일 수 있으며, 이웃에게 봉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 헤세드(chesed): '변하지 않는 어머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어진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의미이다. 어머니처럼,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의 둘레를 확장하여 타인을 자신처럼 아끼는 마음을 지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비슷한 말 같다.
위 세 가지 원칙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깨달음, 경전을 읽고 자신의 길을 깨닫는 원칙 토라)와 자비(헤세드)에다 일상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아보다가 덧붙여진 원칙 같다.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말은 '아보다'이다. 이게 오늘 우리가 말하는 '제사'가 아닐까? 도올 김용옥 교수는 <<주역>> 유튜브 강의에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의 해석에서 "亨"을 "그대는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제사를 지내 만인, 만물과 형통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려라"는 말로 풀이를 했다. 그래서 "亨'은 '나눔'이라는 거다. 그런 나무으로 우리는 '만사형통(萬事亨通)하는 것이 아닐까? <문언>에서는 "형"을 "사물을 생성하는 과정의 형통함"으로 풀이했다. "사물이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계절로 말하면 여름이요, 사람으로 말하자면 예(예)가 되니, 이것은 모든 아름다움이 모여 회통(會通)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에서는 일하고, 안식일에 '예배'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매주 가는 '미사'가 아름다움이 모여 회통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적으로 "관(觀)"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 본다. 오래 관찰하면 오늘 아침 같은 시가 나온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한 곳에 시선을 머무르게 하여야 시가 나온다. 그래 프랑스 천재 시인 랭보는 시인을 '견자(見者, voyant)'라 했다.
섬/함민복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기존의 이해를 근거로 판단하면 울타리는 높은 것이고 길을 막는 것이다. 관찰의 힘이다. 미리 판단하여 시선을 거두어 들이지 않고 섬에 직접 오래 머물게 한 시인의 노고를 통하여 우리는 가장 낮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길이 되어 버리는 울타리를 두른 새로운 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시인의 힘인데, 오랜 관찰의 결과이다. 새로운 섬이 등장한 것이다. 이게 '보는 사람' 견자, 시인의 힘이다.
없던 진실을 있게 만드는 일, 이것이 창조이다. 창조는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집요한 보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열리는 새로운 빛이다. 그래 우린 가끔씩 판단 중지를 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오랫동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창조자는 빌려 쓰거나 따라 하지 않는다. 이게 인문정신에서 나온다. 이젠 새로워지는 일을 하려면 우선 집요하게 보아야 한다. 거기다,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배하고 있는 구태의연한 선입견으로 채워진 자신이 허물어져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허심(虛心) 또는 무심(無心)이라 한다. 장자 식으로 말하면, 심재(心齋), 마음 굶기기라 한다. 종합해서 말하면, 새로워지려면 볼 수 있고, 볼 수 있으면 새로워 진다. 보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를 '안목(眼目)'이라고, 또 '시선의 높이'라고 한다. <관괘>의 효사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내일도 "관(관"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더 해볼 생각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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