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6일)
오늘은 노자 <<도덕경>> 제3장 마지막 문장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 즉무불치)"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노자의 "무위"라는 말은 제2장에서 부터 나온다. 노자는 "無爲之事(무위지사)" 속에서 살라는 가르침을 <<도덕경>> 처음부터 말한다. 성인(자유인)은 "무위의 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거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무(無)'자를 우리는 잘 이해하여야 한다. 노자에게 있어서 '무'는 부정사(부정사)로 쓰이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는 품사로서 기능한다. '무'는 '무명(無名, 이름이 없음)', '무형(無形, 형태가 없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가 '없음'이라기 보다는 '빔(虛)'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무'가 부정부사로 쓰일 때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무분별의 세계를 지향하는 심오하고도 긍정적인 의미가 동시에 곁들어진다. 예컨대, '무지(無知)'도 '앎이 없음(ignorance)'이 아니라, 무분별의 차원 높은 앎의 경지를 의미하게 된다. 도올의 깔끔한 강의를 듣고 정리한 것이다.
그래 나는 '무'를 '없음'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지운다', '버린다'라는 동사로 본다. 그냥 없애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비우거나 버리는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도 새롭게 해석이 된다. '무소유'란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기 위해 버린다는 적극적인 실천적 의미를 갖는 거고,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물건의 물성(物性)을 유지시키는 적극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무위'에서 '무(爲)'가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 무어라 해도 살아있다는 거다. 그리고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서 '위(爲)'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서 죽을 때까지 위(爲), 즉 함(doing)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위'는 '함이 없음'이 아니라, '무(無)적인 함'을 하는 것이다. 도올의 멋진 설명이다. "생명을 거스르는 '함'이 아닌, '우주생명과 합치되는 창조적인 '함'이며,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어긋나는 '망위(忘爲)가 없는 함'을 하는 것이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도덕경>> 제3장을 읽다 보니, 노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에게 '유명(有名)'에서 '무명'으로. 유형(無形)'에서 '무형'으로 '건너가기'를 권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무명의 위'이며, '무형의 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무위에서 대비되는 개념이 '유위'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유위'는 무엇인가를 자꾸 하면 할수록 사태가 엉크러져 가는 상황을 일으킨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 그걸 자주 만난다. 그러니 꼬인 상황을 풀려고 애쓰지 말고 내버려두면 저절로 풀려나가게 하는 게 '무위'라 보는 것 같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무위'라는 단어는 '무(無)적인 무', '무명의 무', '무형의 무'로 읽을 수 있다. '위무위'에서 '무위'가 '함(爲)의 목적어로 보고, '함이 없을 함'으로 읽어야 한다. '무위'는 '위'의 부정태가 아니라, 위의 소이연(所以然, 그리 된 까닭)이다. 그러니까 '무위'는 우리의 삶이 살천해야 할 '위'인 것이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함'이다. 그러나 함은 '함이 없음'의 실천이다. 왜 노자는 이런 말을 했을 까? 무위하면 다스려지지 아니함이 없을 거라는 것을 말하고 자 함 같다. 도올의 생각은 그래야 평화로운 세상이 온다는 거다.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라는 말을 잘 못 이해하면, 삶이 무겁다." '무위' 이야기는 <<도덕경>> 여러 곳에 나온다. <<도덕경>> 제7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만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자신이 앞서게 된다. 자신을 소홀히 하지만, 오히려 보존된다"고 했다. 노자는 앞서고 보존되기 위해서,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할 뿐이다. 그리고 <<도덕경>> 제22장에서, 노자는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 이젠 동네 일에 손을 뗄 생각이다. 일을 하다 보니, 자꾸 '유위'가 생긴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을 오늘 <<도덕경>> 3장을 읽으며 다시 되새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모든 행위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수 있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죽는 날까지 맑은 영혼을 만들다 갈 생각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기철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입니다
한 번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들이
길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 지어 부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입니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요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입니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상 가에 모여앉아
꽃물 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마에 환한 꽃빛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어둠이 목화송이처럼 내려와
꽃들이 잎을 포개면
그날 밤 갓 시집 온 신부는
꽃처럼 아름다운 첫 아일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나 혼자 베갯모를 베고
그 소문을 화신처럼 듣는 일입니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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