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7일)
어제 이야기 했던,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은 우주의 순환이나 사계절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또한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그런 차원에서 '무위'는 동시에 어떤 것을 '안 하기'가 될 수 있다. 오래 전에 배철현 교수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실제로 ‘안 하기'가 ‘하기보다 더 힘들다. 무언가 '하기'는 거의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아침에 일어나기, 식사하기, 생각나는 대로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쥐고 페북 보기, 홈쇼핑보고 나도 모르게 주문하기,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좋다고 따라 하기. 현대인의 삶의 대부분은 ‘하기'다. 그 '하기'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며 습관적이다. 그리고 자동적이다. 반면 어떤 것을 '안 하기'는 의도적이며 의식적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늦게 잠자리에 들지 않기, 요가수련을 위해서 불필요한 행동이나 말 않기. 내가 성취하고 싶은 삶을 위해서는 과거의 내가 원하는 삶의 스타일을 바꾸거나 정지하기. 안하기는 분명 하기보다 힘들다. 배교수가 한 말인데, 나도 그렇다.
어제 우리가 읽은 노자의 <<도덕경>> 제 3장에서 "위무위 칙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에서,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주의 순환이나 사시사철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안 하기를 할 때, 내가 장악하지 못할 것이 없다."(배철현) 지구는 스스로 하루에 정확히 한번 스스로 돌고, 일 년에 한번 태양주위를 돌며, 태양계는 거대한 은하수의 일부이며, 내가 속한 은하수는 블랙홀 주위를 2억 광년에 걸쳐 한번 돌 것이다. 만일 지구가 자전을 12시간만에 하거나 이틀에 걸쳐 한다면, 지구는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것도 안 하는 지구는 정교한 원칙에 따라, 자신의 길을 묵묵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고 있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자연(自然)’이다. 말 그대로 하면 '스스로 그러함'이다. 지구도 50억년 후엔 힘이 없어 멈출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지구가 오늘 자전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길을 오랫동안 구축하고, 그 길 선상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런 차원에서, 무위(無爲)는 '정교한 인위(人爲)'일 수 있다. '무위'는 오랜 연습과 훈련, 시행착오와 수정, 혹독한 자기점검과 자기변화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일 수도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행운이 찾아 올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그릇이 마련되지 않아, 금방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불행이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창조는 무위의 실천"이라 말한다.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창세기>에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는 '바라(bara)'인데, '바라'라는 동사의 피상적이며 거친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라는 뜻이라 했다. 그러니까 '창조하다'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재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하게 제거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 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라는 거다. 다시 말하면, 'chaos(한덩어리)'를 처낸 것이 'cosmos(질서)'라는 거다. 그러니까 질서는 버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창조는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카오스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한 존재가 무질서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 쓸데없는 것들을 잘라 낸다'는 의미에서, 창조는 ‘안 하기'이기도 하다. 배 교수님에게 배웠다. 유대인들이 우주창조이야기를 ‘안 하기'로 시작했다면, 신에 대한 노래인 <시편>도 마찬가지로 '안 하기'로 시작한다고 했다. 오늘의 시를 공유한 다음, <시편>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 시에 나오는 나비가 .무위'를 실천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나비는 길을 묻지 않는다/박상옥
나비는 날아오르는 순간 집을 버린다.
날개 접고 쉬는 자리가 집이다.
잎에서 꽃으로 꽃에서 잎으로 옮겨 다니며
어디에다 집을 지을까 생각하지 않는다.
햇빛으로 치장하고 이슬로 양식을 삼는다.
배불리 먹지 않아도 고요히 내일이 온다.
높게 날아오르지 않아도 지상의 아름다움이
낮은 곳에 있음을 안다.
나비는 길 위에 길을 묻지 않는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이 시 보다 더 멋지다. "길을 묻지 않으니 삐뚤삐뚤 갈지자로 날아가는 군. 내비게이션을 써 보면 달라질 걸. 쉬는 자리가 집이라니 홈리스로 군. 취직을 시켜서 청약저축을 들게 해야 해. 평생 잎과 꽃 사이 옮겨 다녔다니, 알프스의 봄꽃과 안데스의 가을꽃 관광 상품을 팔아야겠군. 햇빛으로 치장한다니 선크림은 필수고, 이슬로 양식을 삼는다니 참이슬을 권해야겠군. 배불리 먹지 않는다지만 야근 후 치맥은 피할 재간 없겠지. 고요했다지만 게을렀던 거야. 출근부 찍느라 정신이 바짝 날 걸. 지상의 낮은 곳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슬기인간들은 왜 우주로 나갈 생각을 하겠나. 길 위에 길을 묻지 않으니 조상 대대로 겨우 나비였던 거야. 이제 나비를 인간 답게 만들어 새로운 시장의 소비 주체로 만들어야 해." '하기'와 '안 하기', '유위'와 '무위'가 무언 지 알겠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levillaco.co.k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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