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15일)
고대에 이성이 잉태되었지만, 그 이성은 유기체론적인 세계관에 묻혀 개인의 평등한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게 고대에 태어난 이성은 중세에도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기존의 세계관과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역할을 했으며, 개인의 보편적 존엄을 옹호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평등과 내면 세계에 대한 의식도 비슷하다. 이렇게 1000년에 걸쳐 씨앗이 심어지고 싹텄던 평등의식과 내면 세계는 근대에 들어오며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이며, 나의 사적인 영역에는 다름 사람들이 개입할 수 없다는 의식이다. 오늘은 어떤 요인들이 작동해 근대에 개인이 꽃을 피우게 되었는가를 알아본다.
우리는 근대의 시작을 르네상스(renaissance)로 본다. 중세라는 10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세계와 인간이 발견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르네상스 시기이다. 암흑에서 빛으로, 종교와 미신에서 이성과 과학으로, 체제에 종속된 인간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전환되는 신호탄을 르네상스가 쏘아 올린 것이다. 르네상스가 인간과 삶을 다시 생각하는 데 기여했다. 중세의 지루한 스콜라 학문에 진력난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과 예술에 새롭게 관심을 가지면서 고대의 인문학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관심이 불쑥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르네상스가 인간의 존엄을 새롭게 깨우치고, 그것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중세부터 싹터온 의식들이 근대를 맞아 꽃을 피운 것으로 봐야 옳다.
물론 씨앗 없이는 꽃이 필 수 없지만, 모든 씨앗이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닌 것처럼, 꽃을 피우려면 적절한 환경 속에서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이처럼,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사회적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은 10세기에 들어오면서 혼란스러웠던 과거에서 벗어난다. 특히 농업이 발전해 식량 문제가 해결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사람들은 먹거리를 찾아 교역이 활발한 도시로 이주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도시에서는 자연히 산업과 상업이 발전하였다. 특히 이탈리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 확대로 다른 지역에 비해 상업이 더 발전했고, 부가 축적될 수 있었다. 그러면 중소 상공업자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귀족과 종교 지도자들이 독점하던 가치관의 통제에서 풀려나 분방함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종교적 서사와 종교적 성찰이 주를 이루던 것이 시와 소설 등 문학을 비롯해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예술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삶에 밀착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원래 르네상스가 말 그대로 하면, 부활, 부흥 등을 의미하는 데, 우리가 르네상스 하면, '문예부흥'을 더 떠올린다. 아마도 르네상스 시기에 문학과 예술이 전례 없이 확대된 것에 주목한 결과가 아닐까?
이탈리아세 시작한 르네상스 운동은 유럽 전체로 확대되면서 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예술가들의 지위도 올라갔다. 그리고 내적인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싹트고, 이젠 느낌에 머물지 않고 생각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 지, 어떻게 사는 게 옳은 지의 문제가 기성의 관념에 좌우되지 않고, 나의 개인적인 성찰과 판단에 따라 정립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다른 중요한 경향은 고전에 대한 관심의 확산이다. 인쇄술의 발달로 귀족들 만이 접근했던 고전의 지혜에 시민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고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인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휴머니즘(humanism)'이라 부르는 인본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여기서 휴머니즘은 '인간 다움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고대 키케로가 사람이 지닌 '인간 다움'을 의미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개념이 그 원류이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이 사람 답게 사는 것인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인간 다움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치를 추종하는 데 있지 않으며, 개인 내부에 있는 것들을 활짝 꽃피운 데 있다는 생각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내부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스스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더 나아가, 개인의 이상과 꿈이 존중 받고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할 권리를 인정받는 것에 인간의 존엄과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생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과거의 권위주의를 송두리째 흔들면서 개인을 사유의 중심에 놓기 시작했다.
주어진 신분에 맞게 공동체의 보존과 조화에 기여하는 것이 사람 답다는 생각은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었고, 인간 다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익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일어난 것이 15세기 종교개혁이다. 나름대로 교황과 왕의 균형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하며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왕권에 밀린 교황청이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 70년간 프랑크 제국 왕의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교황권은 약화된다. 이후 로마로 회귀하지만 이전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한다. 반면 왕들의 권력은 점차 확대된다.
가톨릭에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사제 체계는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 이었다. 그런데 면죄부를 파는 등 비도덕적 행동을 하는 사제들은 상종하고 싶지 않은 존재들로 인식되었다. 절대자를 만나 자니 이들을 상대해야 하고, 이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니 마땅히 천국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 딜레마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마르틴 루터이다. 그는 신을 대리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교회 제도 자체를 부인했다. 당시 종교개혁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신조는 다음과 같이 5 가지 강령이었다.
- 오직 성경(솔라 스크립투아, Sola Scriptura)
- 오직 은혜(솔라 그라티아, Sola Gratia)
- 오직 그리스도(솔라, 크리스투스, Sola Christus)
- 오직 믿음(솔라 피데, Sola Fide)
- 오직 여호와께 영광(솧히데오 글로리아, Soli Deo Gloria)
이것들은 신앙인 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결국 나의 구원은 나와 절대자 사이의 일대일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고대 기독교의 회귀이다. 이제 이 시대를 지배한 개인주의는 신앙을 거쳐 사회 전 영역으로 확대된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정의가 도전 받으며, 인간 다움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래 인간 다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래 연휴 기간 동안, 김기현 교수의 <<인간 다움>> 꼼꼼하게 읽고 정리한 것을 공유한다. 저자는 인간 다움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공감을 연료로 하고, 이성을 엔진으로 해 자율적으로 공동 체적인 규범을 구성해 공존하는 성품"이다. 공감이 빠지면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의식 자체가 시작되기 어렵다. 그러나 공감만으로는 모든 인격체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어렵기에 이성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때 이성이 누군가의 전유물이 되어 공동체적 규범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개인 스스로가 자율적 성찰을 통해 이성을 발원함으로써 공존의 윤리에 도달해야 한다. 인간 다움은 그럴 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주로 이런 식으로 사유를 했는데, 한국에 귀국하여 다시 읽은 <<장자>>에서 인간 다움을 더 쉽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았다. 장자는 "각득기의(各得基宜, 모든 존재가 각기 고유의 마땅한 길을 가지고 있다)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고 했다. "각득기의"라는 말은 <<장자>>의 핵심일 수 있다. 장자의 기본입장은 인간은 자연물이고 자연에 속해 있다고 본다. 자연은 다만 균형을 잡을 뿐, 시비하지 않는다. 균형을 잡는 것을 "천예(天倪, 자연의 작용)"라 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하늘의 맷돌(天硏)", "하늘의 균형대(天鈞)"라고도 한다. "천예"의 조화 속에 사는 각 존재자들은 각각 자기 방식에 마땅한 길을 가고 있다는 거다. '각자 생존의 방식, 실존의 방식, 사고의 방식이 다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한다. 그런데 만약에 옳다고 생각한다고 안 할 때 조차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데 누가 누군가를 바꾸려 한다는 것, 이게 '상정(相正)'이다. 상대를 똑바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때문에 제대로 된 존재자 간의 관계성은 '상정(相正)'이 아니라 '상존(相存)', 서로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올바르게 될 것, 이게 '자정(自正)'이다. 거기에 맡겨라. 이게 장자 방식이다.
"각득기의"는 그대로 비출 뿐인 거울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비추는 거울의 주관이나 가치가 상대에게 가해지지 않는 마음일 경우 우리는 대상과의 편견 없는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충고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거다. 상대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고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도록 다만 용기를 주는 거다. "떠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라."
또 다른 충고들/장 루슬로(프랑스 영화감독이자 시인)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도우려 들지 말라.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성급한 도움이 그를 화나게 하거나
다치게 할 수 있다.
하늘의 여러 별자리 가운데서
제자리를 벗어난 별을 보거든
별에게 충고하지 말고 참아라.
별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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