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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무지(無知)', '무욕(無欲)', '무위(無爲)'.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4일)

노자는 "안민(安民)의 길" 또는 "부쟁(不爭)의 길"에 대한 해결 방법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말한다. 성인의 다스림은 (1)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강하게 한다. (2)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과 욕망을 멀리하게 하고 감히 지혜를 뽐내며,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이 말만 들으면 뭔 소리인 줄 모른다. 우리는 이런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기득권자들로부터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어렵더라도 천천히 읽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제는 '무엇이 중요한가'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 (2)"사람들로 하여금 지식과 욕망을 멀리하게 하고 감히 지혜를 뽐내며,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의 방법을 정리해 본다. 이 것은 어제 이야기했던 "허기심 실기복"의 궁극적인 결론이다. 우선 원문은 이렇다.
⑤ 常使民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使夫智者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과 욕망을 멀리하게 하고 감히 지혜를 뽐내며,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도올은 "늘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게 하고 욕심을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석한다.
⑥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 즉무불치): 무위(함의 없음을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성인은 나아가 사람들로 "무지(無知)', '무욕(無欲)', '무위(無爲)'의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는 거다. 이 '무위'의 다스림이 최고의 다스림으로, 이렇게 되면 만사가 저절로 풀려갈 것이라는 거다. 이 중에서 우선, 성인의 다스림은 항상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무지하고 무욕하게 만드는 거란 말을  시작한다.

여기서 "무지"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지(ignorance)'가 아니라, 개념적 사유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말하는 거로 본다. 도올은 "대뇌피질의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는 순결한 상태"로 해석하였다. 우리가 그제(2월 12일)에 살펴보았던, "불상현, 불귀난득지화"의 세상은 결국 무지 무욕하는 순결한 인간들의 복감(腹感)이 교감하는 사회"라는 거다. '복감'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복감'이란 '머리로 하는 사고'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사고'로 나는 이해한다. 어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착한 사람들은 마음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행복을 가져온다'고 했다. 어쨌든 나는 도올이 말하는 "복감이 교감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아침이다. 그런 차원에서 무지, 무욕은 평화의 원천인 거다. 평화는 지(志)와 욕(欲)을 해탈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사회에서는 지혜롭다 하는 자들이 뭘 한다고 설치지 못한다. 도올의 지적을 직접 들어 본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을 설치게 만들어 경쟁을 부추기고 부질 없는 작위를 일삼고 무용의 건물들을 계속 짓게 만든다. 코로나가 유발시킨 사회변혁, 반성의 계기들을 상고하면 이 노자의 충언이 얼마나 진실된 언어인가를 새삼 반추하게 된다." 좀 더 쉽게 다시 말해 본다.

그러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 무욕하게 한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지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志)나 욕(欲) 행사되면서 드러나는 특정한 방향으로의 지향성과 거기서 생겨나는 배타성을 보자는 거다. 세계는 하나의 욕망으로, 하나의 지향성으로, 하나의 배타적 체계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것은 현실을 잊어버리고, 생래적 무지 속에서 희희 낙낙하면서 천진스럽게 살아가게하여, 기득권자들이 마음 놓고 억압하고 착취하기 쉬운 사회로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노자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 훌륭하다는 것, 귀중하다는 것, 탐날 만한 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궁극 가치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가져 보라는 거다. 무지(無知)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을 무지하게 해야 한다는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무지를 강조한 것은 우리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얻어진 일상적인 지식, 세상을 도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는 데서 나온 단견, 소위 분별지(分別知)로서의 지식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는 거다. 이른바 잘못된 배움을 "없애 가는"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오강남의 해석이다.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어 간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버리는(unlearnin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지구가 판판하다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 얻어졌던 일상적 지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한 '무지'의 경지에 이르면, 그 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라 할 수 있다. 오강남의 멋진 설명이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들 때 진짜 자유를 얻는 것이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문해 본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새로운 월요일로 할 일들이 많은데, 코로나-19로, 게다가 대통령 선거로 세상이 어수선하다. 이럴수록 삶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럴수록 고전이나 경전을 읽어야 한다. 오늘 아침 나는 노자가 말하는 "무지", "무욕"을 사유하고 있다. '"무욕" 이야기는 시를 한 편 공유한 후 이어간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힘들게 돌아가도.

오늘 시를 보면, 날이 저물고 장사를 마친 부부가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먹는다. 탁주도 한 잔 곁들이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죽을 먹으러 찾아온 손님들의 온순한 성품에 대해 말을 나눈다. 작은 가게에서 따뜻한 죽을 내놓으면서 만난 소박하고, 자상하고, 명랑하고, 자잘한 정이 많은 사람들의 됨됨이에 대해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라는 드넓은 평원(平原)의 고귀한, 진정한 주인이라고 말한다. 늙은 염소처럼 순한 부부가 살아가는 훈훈한 삶의 풍경이다. 오늘 시에 나오는 부부처럼, 마음을 비우고, 그렇게 살고 싶다. 오늘 아침 사진의 제주도 바다처럼, 무심하게 단순하게 살고 싶다.

초식동물/고증식

장사 끝난 죽집에 앉아
내외가 늦은 저녁을 먹는다
옆에는 막걸리도 한 병 모셔놓고
열 평 남짓 가게 안이
한층 깊고 오순도순해졌다
막걸리 잔을 단숨에 비운 아내가
반짝, 한 소식 넣는다

― 죽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순한 거 같아
초식동물들 같아

내외는 늙은 염소처럼 주억거리고
한결 새로워진 말의 밥상 위로
어둠이 쫑긋 귀를 세우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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