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문해력은 지식을 사용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능력이다.

246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31일)

송숙희의 <<일머리 문해력>>이라는 책을 읽는데, 같은 내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요지는 문해력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과 문해력과 일 잘하는 머리, 즉 일머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가 요구하는 메타 문해력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문해력(리터러시, literacy)은 전통적으로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문자 해독 능력을 뜻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해력이라 하면, 이를 넘어 ICT에 의한 초 연결 정보화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 역량의 핵심이 되었다. 문자, 카톡, 무서, 기사, 책 등의 텍스트 정보든, 음성, 음악 등의 소리 정보든, 그림, 사진 등의 이미지 정보든, 방송, 영화 등의 여상 정보든, 모든 정보를 읽어내는 능력을 말한다.

문해력은 지식을 사용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 힘을 기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쓰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바친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인 맥킨지 앤드 컴퍼니(Mckinsey & Company)는 현재 가능한 기술로 자동화하기가 가장 어려운 활동으로 인력을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과 전문 지식을 활용해 의사 결정을 하고 계획하는 창조적인 일을 선정했다. 왜냐하면 이런 일에는 메타 문해력이라는 엔진이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늘 삶의 발목을 잡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급급하다. 실제로 칼 포퍼(Karl Popper)는 "모든 생물은 오류를 수정하는 것으로 진보한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생존을 방해하는 오류를 수정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더 질 좋은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해력이 떨어질수록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생활의 질의 격차도 이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젊은 시절에 일정한 문해력을 갖추었다 해서 평생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한 텍스트를 읽는 수준은 어릴 때 학습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이에 따른 성숙에 알맞게 필요한 정보의 양과 질을 확장하는 일이나 시대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학교 공부에서 끝나지 않는다. 꾸준한 학습을 통해 자기가 알고 실천하는 일들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문해력은 서서히 바닥까지 떨어진다. 어쨌든 문해력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

그리고 문해력을 키우면 문제해결 능력인 일머리를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송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해력은 4차 산업, 웹3,0 등의 이름으로 디지털화된 지식 사회에서 요구하는 '머리로 하는 힘', 일머리를 키워준다." 이는 읽고, 생각하고, 쓰기라는 프로세스로 가동되는 문해력으로 작동한다는 거다. 직접 말을 들어 본다. "첨단 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 '읽고, 생각하고 쓰기'라는 기초 중의 기초적인 능력, 즉 문해력이 중요한 것은 '읽고 쓰는 능력'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일머리가 작동하게 만드는 두뇌의 운영체계(OS, operating system)이기 때문이다. 우리 두뇌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아서 사용기에 따라 성과의 차이가 엄청나다. 두뇌가 과제를 수행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이 하드웨어를 작동하게 하려면, '입력-처리-출력 프로세스'로 가동되는 소프트웨어를 깔아야 한다. '읽기-생각하기-쓰기 프로세스'로 가동되는 문해력이 바로 일 머리 소프트웨어이다."

지식과 정보가 귀할 때는 이것들이 희소자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차고 넘치면 오히려 인간의 주의력이 희소자원이다. 여기서 주의력을 키워 주는 것이 메타 문해력이라 한다. 메타 문해력이란 정보의 편향성과 신뢰성을 평가하고 지식의 생산과 공유의 맥락에서 정보를 적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메타 문해력을 갖췄다는 것은 그 희소자원으로 분별력 있게 글을 읽고, 조리 있게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독자를 집중하게 만드는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본체라는 하드웨어를 돌리기 위해 윈도우나 리눅스, 맥OS 같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전달된 정보를 받아들인 컴퓨터 하드웨어는 내부의 논리 회로를 거쳐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이를 IPO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인풋(input, 입력)-프로세싱(processing, 처리)-아웃 풋(output, 출력)' 과정으로 구동된다. 챗GPT 생성형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문해력도 의도한 대로 읽고, 생각하고, 쓰는 프로세스로 일 머리를 구동하게 만드는 소프트웨어이다. 따라서 일 머리 좋은 사람은 컴퓨터처럼 뒤에 출력물을 만들며 문제를 해결한다. 다음과 같다. 문해력은 읽기만으로, 또는 쓰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반드시 읽기와 생각하기, 쓰기가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문제 발생 → 입력=읽기 → 처리=생각하기 → 출력=쓰기 → 문제 해결

읽기: 문제 해결에 필요한 자료 입력-문제 해결을 목표로 정보, 지식, 경험, 사례를 수집한다.
생각 하기: 문제 해결을 위한 생각 처리 작업-입력한 내용을 연결하고 통합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도출한다.
쓰기: 도출한 해결책 공유-해결책을 문서로 만들어 공유하며, 협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성과를 창출한다.

두뇌를 구동하는 소프트웨어인 문해력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아이디어를 만들고 담아내는 지적 생산성이 높아진다. 그 결과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가공함으로써 의미 있는 아웃풋을 만들어 낸다. 지적 생산성이 높으면 무슨 일을 하든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이며, 그 결과 단시간에 큰 성과를 낸다. 

문해력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고, 내일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필요한 메타 문해력 이야기를 이어갈 생각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복효근 시인의 <구름의 문장>이다. 세월은 화살처럼 날라 벌써 오늘이 8월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부터는 9월이다. 세상은 거꾸로 간다. 그래 하늘을 보았더니 구름의 문장들이 읽힌다.


구름의 문장/복효근 

 울지 않는 전화기를 몇 번이나 들춰보고
 기척 없는 앞마당을 자꾸만 흘깃거리다가
 소주병을 꺼내려다 만다
 법구경 몇 페이지를 펼쳐보다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에 잠깐 멈칫거리다가
 겨우 한 줄 써본다 
 '나는 나로써 나다'
 애써 다독이는데
 문득 댓돌 틈에 핀 괭이밥풀꽃 한 송이에
 울컥 
 꽃은 너였다가 또 너였다가 또 너였다가 
 수많은 너였다가 
 한 줄 다시 써본다 
 '나는 너로써 나다'
 서쪽 하늘엔 구름 한 무더기 모였다 흩어지고


우리는 사회적으로 가시화된 것 이상을 알 수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삶, 즉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는 상상력을 가질 수 없다. 모르는 것도 아는 한도 내에서만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는 것 내에서만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최근에 스마트폰의 발달로, 검색은 정보를 얻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검색은 정보를 얻는 방법이 아니다. 이미 내 머릿속에 입력된 것을 더 구체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무언가를 전혀 알지 못하면, 검색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다. 검색은 입력 창에 아는 것을 넣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입력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다른 경험이 없다면 영원히 모르는 세계이다. 
 
그래서 빈부격차보다 무서운 현상이 지적 양극화이고, 현재 우리 사회에 급속도로 실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인터넷(Inter-net)이란,  단어 뜻 그대로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특정 정보만 담는 그물 망들의 간격'이다. 우리가 찾는 정보는 이미 누군가 쳐 놓은 그물 안에만 존재한다. 인터넷은 항구에 정박 된 여러 가지 선박들일 뿐이다. 그런 배에서는 고기를 잡을 수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다. 

책이나 종이 신문을 열람하는 것과 이미 누군 가의 수차례 선별을 거친 온라인 기사를 읽는 것은 같은 행위가 아니다. 모니터는 내가 읽은 것이 어떤 맥락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사회는 인터넷 정보만을 맹신하면서 자기 생각은 없고 고집 센 사람들만 늘어나고 있다. 거기다 유튜브에 너무 매달린다. 
 
수험 서와 참고서로만 채워지지 않은 다양한 책이 구비된 동네 서점, 좋은 책인데 안 알려진 책만 모아 놓은 서점, 장서가 많은 도서관들이 많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안목을 넘어 선구안(選球眼)을 기르기 위해 우리 몸을 덮어쓰고 있는 그물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문 운동가의 글을 '꼼꼼하게' 읽었으면 한다. 어렵고 길더라도, 문제 제기를 하려면, 우선 선구안(選球眼)을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사용하는 '선구안'이란 말을 나는 좋아 한다. 선구안은 지식 전반, 국가 경영, 사회의 성숙, 개인의 인생 등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판단력, 안목, 문제 의식, 질문'일 수 있다. 

공동체의 운명은 지도자와 구성원들의 '선구안'에 달려 있다. 야구에서 타석의 선수가 매번 공을 판단하듯, 스트라이크 존은 앎과 삶의 범위를 상징한다. 그러한 선구안은 문해력에서 나온다. 지금 우리 정부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선구안'이 문제이다. 하는 일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문해력이 매우 낮다. 읽고, 생각하고, 쓰기를 해 본일이 없기 때문이다.

문해력이 낮고, '선구안'이 부족한 사람들은 리더이면서 '베이비 토크(Baby talk, 유아들의 말)'를 한다. 그것은 사고의 유아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고의 미숙함과 짧고 단순한 어휘들로 이뤄진 언어의 유아성을 드러난다. 예컨대, 1+1은 2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3으로, 10으로, 100으로도 만드는 것이 정치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유아적 사고다. 이미 정해진 '가치'가 아닌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이냐를 숙의하고 조정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유아적 인식이다. <시민언론 민들>의 이명재 기자의 글을 보고 배운 거다.

유아들의 말, '베이비 토크'는 자신을 객관 화하지 못하는 유아들의 미성숙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자신과 다른 사물들 간의 거리를 인식하는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유아의 머릿속에선 자신과 사물 간의 관계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깊은 대화는 대개 개념의 진술로, 개념과 개념 간을 연결 짓는 진술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개념의 축적과 확장에 비례해 좀 더 대화다운 대화, 성숙한 대화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개념에 대한 이해, 개념의 축적은 어휘의 확장을 통해 쌓이고 표현되는 것이다. 또한 그 역의 과정으로 양자는 서로를 넓히고 확대된다. 그러며 어휘가 늘어나고 사고가 확장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화'를 할 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을 말의 독점권인 듯 행사하며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내뱉는다. 자신의 말을 교시(敎示, 가르침)처럼 들어주는 이들이 도열해 있고, 자신을 위해 마련된 무대 위에서, 쓰여진 대본대로 말할 수 있다. 아니면, 대본이 없을 때의 횡설과 수설이라도, 어떤 '아무 말'이나를 하더라도 발언권은 항상 그에게 전유돼 있기에 말을 막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의 말은 사실 '대화'가 아닌 '독백'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말들이었다.

현 대통령이 그렇다. 이명재 기자의 지적인데, 나 자신은 그 이유를 잘 몰랐다가, 이번에 인지하게 된 것이다. 현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  부닥치는 곤란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외국에서의 말의 침묵은 국내에서의 다변과 대조적이다. 국내에서는 1시간 중에 50분 이상 발언을 독점한다고 하는 그인데, 외국에 나가면 왜 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을 잃는 것인가. 국내에서의 사실상 무인지경에서의 독백이 아닌 상대와의 '대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그가 만나는 이들은 부하들이나 그를 전적으로 우러르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 외국의 정상들 과의 대화에서 그는 각본대로 얘기할 수 없다. 준비된 말을 '읽는' 것을 마칠 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되지만 그는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는 대화에 제대로 참여할 수가 없다.

반면, 국외 외교무대에서 할 말이 없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그는 그러나 국내에서는 맘껏 말을 쏟아낸다. 특히 자신과 동종 동류인 집단 앞일 때의 그의 말은 호기롭기 짝이 없다. 예컨대,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에 대해 불안해하는 국민들에게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던 그가 주먹을 내지르며 열변을 토했던 곳이 국힘당 연찬회였다는 것도 이러한 사정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에서의 한일 양자 회담에서 과거사 문제, 독도 영유권, 동해 표기, 후쿠시마 핵 폐수 방류 등 현안에 대해 전혀 거론하지 않았던 모습과 달리 자신에게 환호하며, 자기 말을 교시처럼 받드는 이들 앞에서의 호언이며 웅변이었다.

그리고 그 연찬회에서, 그는 지난 정부를 비난하면서 “돈은 없는데 사장이 벤츠 600 같은 고급 승용차를 막 굴리는 식으로 해서 안 망한 기업이 없다”고 말 했다. 그 말이야 말로 실은 스스로를 제대로 짚은 것이었다.  갖춘 게 없는 이가 벤츠를 굴리듯 가진 게 없는 이가 '막강한 권력을 굴리고 있는' 이가 누군 지를 그 자신이 제대로 말해줬다. 그는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은 '자기 고백'을 발설한 셈이었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9월의 시/조병화  (0) 2023.09.02
사람이 하늘처럼/법정 스님  (0) 2023.09.02
산속에서/나희덕  (0) 2023.09.01
9월의 기도/박화목  (0) 2023.09.01
늙는다는 것/김재진  (1) 2023.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