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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볕 좋은 날/이재무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8월의 마지막 날이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다. 그런데 코로나-19의 재 창궐로 사회 분위기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 앉았다. 어제 날씨는 습도가 많은 동남아 날씨 같았다. 그래도 새로 시작하는 한 주, 또 기운 내고 싶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9월은 빨리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침에 이런 페북의 담벼락을 만났다. "생명 같은 예배? 생명 같은 돈이겠지요. 목사님들 예수 믿으세요. 제발. '주 예수'를 '주)예수'로 만들지 마시고, 아무리 돈이 신인 욕망의 세상이라지만." 이런 글을 만난 이상, 인문운동가로서 생각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는 '나를 예배하라'라 단 한 번도 말한 사실이 없다. 예수는 '나를 예배 하라'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6장 24절)고 말했을 뿐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교회에 나와 예수 이름을 외치며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예수가 지향한 가치를 본받고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를 예배하는 것과 예수의 삶과 가치를 따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예수의 삶과 가치를 따른다 말할 수 없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 사람"(마태복음 5장 14-14절)이라고 말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처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는 커녕 세상에 코로나를 전파하여 국민을 위협하는 흉기로 전락했다.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마태복음 5장 13절)라 말씀 하셨다.  맛을 잃어 길가에 버려진 소금은 쓰레기이다. 쓰레기는 쓸데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 가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일부 한국 개신교가 꼭 그런 꼴이다.

오늘 아침 시는 우리 동네 시인 이재무의 <볕 좋은 날>이라는 따뜻한 시를 공유한다. 시처럼, 우리 교회가 그랬으면 하고 꿈꾼다. 하늘의 빛이, 어두운 구름을 치우고, 우리 동네 교회를 밝혀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 사진은, 그런 마음으로, 어제 오후 산책하다가 찍은 것이다.

볕 좋은 날/이재무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발톱을 깎아 주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부은 발등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리
갈퀴처럼 거칠어진 발톱을
알뜰, 살뜰하게 깎다가
뜨락에 내리는 햇살에
잠깐 잠시 눈을 주리
발톱을 깎는 동안
말은 아끼리

눈 들어 그대 이마의 그늘을
그윽하게 바라보리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근심을 깎아 주리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을 위한 예배'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얽어 매고 노예화 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예컨대,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누가 복음 30-37)라며, '사람이 우선'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분명히 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 복음 10장 30-37)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인지 말씀하셨다. 예수는 예배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삶을 원하셨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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