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대학 입시와 취업 고시 외에는 ‘공부’랑 담을 쌓은 사회는 쉬이 ‘중독 사회’가 된다.

246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28일)

앤 윌슨 섀프는 자신의 책 < <중독 사회>>에서 특정 시스템이 다음과 같이 4 가지 신화(잘못된 믿음)에 의해 돌아갈 때 이를 ‘중독 시스템’(또는 ‘중독 사회’)이라 했다.
1. 자기 시스템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시스템임 
2. 자기 시스템이 원래부터 우월함 
3. 자기 시스템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음 
4. 자기 시스템이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객관적임 등이다. 
이 오만한 믿음 아래 특정 시스템(사회)이 마치 알코올 중독자처럼 ‘이상하게’ 작동할 때, 중독 시스템(중독 사회)이 된다. 현실부정, 흑백논리, 책임전가, 통제환상, 적반하장 등이 핵심 특성이다.

우리 사회가 믿고 있는 가치나 기존 현실은  ‘엘리트 시스템’이다. 공부 잘해 일류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사람 대접 받기 어려운 사회이기에,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그 엘리트 시스템 안에서 성공하기를 꿈꾸며 살아간다. 그러니 부모가 당면한 현실은 자녀들에게 일종의 압박으로 작용하고, 그 압박을 내면 화한 아이들은 마치 그 시스템이 옳고 정당한 것처럼 수용하고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려 최선을 다한다. 예컨대, 우리의 현실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강수돌 교수의 글에서 얻어온 거다. "우선 아동과 청소년이 경험하는 현실은 한마디로, ‘공부’ 잘 해 좋은 대학 진학하는 걸 최고로 치는 사회다. 아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 수 없기에 부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부모의 말이 거의 하나님 말씀이다. 부모가 고생해서 너희들 뒷바라지 해주고 있으니 너희는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된다. “공부 하라"는 부모님 말이 하나님 말씀이 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성공하는 10%의 소수나 성공 못하는 90%의 대다수나 스트레스 받기는 매한가지다. 
- 성공하는 10%의 소수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잘 해내야’ 그 엘리트 그룹에 진입한다. 친구가 더 잘하면 시기심에 불탄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그간 고생한 부모님을 배신하는 일이기에 자신을 더 옥죈다.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잘해야’ 하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무조건’ 잘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하면 죄책감에 시달리고 성공하더라도 (특히 부모가 원했던 전공 분야가 자신의 꿈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소외감에 시달린다. 
- 성공하지 못하는 90%는 늘 결핍감, 열등감, 죄책감에 시달린다. 물론,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성공한 10%를 보면서 부러움, 열등감, 패배감을 느끼며 피해의식에 빠지기 쉽다. 이것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묻지 마 범죄’의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중독 시스템(중독 사회)’으로서의 ‘엘리트 시스템’에서는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사람답게’ 살기 힘들다. 우선, 엘리트 그룹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이들은 최소한 ‘겉보기에는’ 사람 답게 사는 듯하다. 하지만 그 깊은 내면은 별로 그렇지 않다. 불행히도 그들의 현실적 삶은 외면과 내면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기에, 심층 내면에서는 늘 공허감, 불안감, 두려움에 시달린다. 표면상 그들 중 대부분은 ‘충만한 행복감’의 얼굴을 보이지만, 심층 심리상 그들은 ‘영원한 불만족’에 시달린다.

대학 입시와 취업 고시 외에는 ‘공부’랑 담을 쌓은 사회는 쉬이 ‘중독 사회’가 된다. 한국이나 일본이 그렇다. 아이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은 기저귀 갈아주고 학교 가기 전까지일 뿐, 일단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고 성적표를 받아오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조건부 사랑’이 시작된다. 부모, 학생, 교사, 교장 등 모두가 ‘공부 잘하는 아이’만 예뻐 한다. 무슨 공부를 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별 토론이 없다. ‘무조건’ 잘 해야 한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에 가도 마찬가지다. 

무슨 전공을 해서 어떤 분야에서 자기만의 꿈을 이루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할 까하는 고뇌는 거의 없고, 오로지 주어진 시스템에서의 출세와 성공, 성과와 안정만이 목표가 된다. 특히, 돈과 권력을 주무르는 위치에 오를수록 주어진 시스템을 당연시하고 적극 옹호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중독 시스템, 중독 사회다. 

물론, 예외는 있다. 인문 운동가로서 내가 추구하는 시스템이다. 엘리트 그룹에 속하더라도 심층적인 성찰을 통해, ‘중독 사회’의 모순을 철저히 간파한 바들이다. 반대로, 엘리트 그룹에 속하지 않아도 역시 심층 비판과 성찰을 통해 더이상 ‘중독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게 된 이들 역시 예외다. 물론, 심층 성찰을 통한 탈신화화의 길, 자기 해방의 길은 쉽지 않다. 현실이 발목을 잡기 일쑤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자유인이 되는 길은 만만치 않다.

그 길은 제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제 정신’이면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데, 우리사회는 어인 일인지, 배운 자일수록, 높은 자일수록, 잘난 자일수록, 엘리트일수록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그리고 마치 ‘정상’처럼 작동하는, 매우 오만한 ‘중독 시스템(중독 사회)’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는 한, 이 어리석음은 반복되고, 아이나 어른 그 누구도 행복하긴 어렵다. '제 정신'이야기는 내일 이어간다. 

우리 사회는 지금 다음과 같이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1. '빈익빈부익부' 사회구조를 고쳐야지 사람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현 시스템은 부의 격차가 교육 격차로, 또 이게 직업 격차와 수입 격차로 이어져 확대 재생산된다. '격차 사회'의 틀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고 개인만 탓하는 것은 문제이다. 우리 사회가 절차적 민주화는 약진했지만, 사회경제 민주화는 걸음마이다. 지금도 여전한 장시간 노동과 고용불안, 차별과 불평등, 노조 억압, 일 중독, 산업재해, 취약한 복지 등이 그 증거이다.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
2.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법 시스템의 신뢰를 높이는 것이다. 인물 검증의 현실적 기준은 완벽성이 아니라 수행성이어야 한다. 직무 수행능력과 의지에 집중해야 한다. 
3. 불평등이나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면 합법성 잣대를 넘어 물신성(物神性)을 극복해야 한다. 물신성이란 특히 화폐(권력)의 지배 아래 본연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그 것들을 우상 숭배하는 것이다. 사회전반에 내면화된 물신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각자 자신을 되돌아 볼 좋은 기회이다.

너무 아픈 이야기를 하니, 따뜻한 시를 한 편 공유하고 싶다. 오늘 아침 사진도 김인중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으로, 빛으로 섬을 만들고 싶어, 시골 청양 정산에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거기서 찍은 거다. "고만례 할머니와 놋양푼 아줌마"를 만나고 온 기분이다.


고만례 할머니와 놋양푼 아줌마/이창숙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고만례 할머니는
어느 여름 저녁
모깃불 피운 멍석에 앉아
밤하늘에 솜솜 박힌 별을 세며
옥수수를 먹고 있었대
그때,
머리에 커다란 짐을 인 아줌마가
사립문을 빼꼼 열고 들어오더래
저녁도 못 먹었다는 아줌마에게
있는 반찬에 남은 밥을 차려준 뒤
짐을 풀어 하나하나 살펴보던 할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놋양푼이
그렇게나 좋아 보였다지 뭐야
며칠 뒤 있을 할아버지 제사 때
떡과 나물과 전을 담으면 좋을 것 같았지
한 개에 삼백 원이라는 놋양푼을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문질러 보다
할머니는 은근하게 흥정을 했대
"세 개 살 테니 천 원에 주슈."
열무 비빔밥을 한입 가득 떠 넣던
놋양푼 아줌마는 눈을 깜빡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그렇게는 안 된다고 거절했대
하지만 할머니는 조르고 또 졸랐지
결국 아줌마는 하룻밤 자고 난 다음 날
천 원에 놋양푼 세 개를 주고 갔대
할머니는 그걸 들고 산길을 내려가
동네방네 자랑을 했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깔깔 웃었지만
이유를 모르는 할머니는
그냥 같이 웃어버렸대
그 뒤로 할머니는 아줌마가 오면
있는 반찬에 함께 저녁을 먹고
나란히 누워 오순도순 얘기를 했지
친자매처럼 가까워져서야
수줍게 고백을 했는데
고만례 할머니도 놋양푼 아줌마도
전혀 셈을 할 줄 몰랐다지 뭐야
"남편이 갑자기 죽어서
헐 수 없이 장사를 시작했슈."
"셈을 모르고서 어찌 장사를 하누."
할머니가 혀를 차며 걱정을 하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대
"괜찮어유. 사는 사람이 하잖유."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줌마는
깊은 산속 고만례 할머니 집을
성님 집처럼 자주 찾아왔대
어느 날
반듯이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고만례 할머니를 안고
눈물 흘리던 그날까지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이생진  (0) 2023.08.30
길/박수소리  (0) 2023.08.30
더딘 사랑/이정록  (0) 2023.08.29
귀뚜라미/나희덕  (0) 2023.08.29
통한다는 말/손 세실리아  (0) 2023.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