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7일
내가 대학생 시절부터 많은 통찰을 얻었던 백낙청 교수님의 송년 특별 기고(한겨레, 12월 30일자)를 읽고 마음에 와 닿아 오늘 아침 그 내용을 공유한다. 내가 인문운동가로 나선 이유이고, 아침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를 쓰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를 인문운동가로 부르지 않고, 인문학자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제일 무서운 것이 '안면몰수'라는 단어이다. 2020년 정말 길고 힘든 한 해였지만, 세상의 '민 낯'이 드러난 의미 있는 해였다. 민 낯이 드러난 세력으로 수구정당은 대안 세력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젠 국민을 속이는 능력을 상실했고, 국민을 속이려는 성의마저 상실하고 누구든 정부를 앞장서 흔들어 대는 인사들의 서포터즈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알게 되었고, 국민을 죽이고 살리는 최종적 권한을 가진 법관들의 정체도 드러났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관성적인 개탄이나 옥석을 안 가리는 과격한 공격이 아니라 냉정한 형세 판단과 착실한 제도 개혁으로 대응해야 한다.
아직 민 낯이 덜 드러난 세력이 경제관료를 포함 관료 집단들이 있다. 그 다음은 언론계이다. 특정 언론사들은 진실 왜곡에 그치지 않고, 그 왜곡 수준이 촛불 정부의 실패를 위한 면밀한 작전 같아 보일 정도이다. 소위 진보 신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정권보다 금권이 우위에 선 지 오래된 우리 사회에서 언론인 집단 자체의 체질에 일어난 변화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여당도 마찬가지이다. 촛불혁명의 개념 조차 희박한 고위관료와 여권 일부 정치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6적을 나는 이렇게 본다. 수구 기득권 세력, 검사들, 언론사들, 판사들, '쩐목'-돈 만 밝히는 목사들 그리고 다수 맘몬(Mamon, 물질적인 부와 돈을 탐하는 사람들)세들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촛불 시민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선한 기운을 북돋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인문운동가가 우리 사회와 청치 현실에 눈 길을 던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서로 선한 기운을 북돋자는 것이다. 인문운동가가 하고자 하는 일은 각각의 개인들에게 하나의 거울을 비추는 일이다. 온통 세상이 이런데 자신만 온전할 확률은 아주 적다.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각자가 스스로 해온 몫이 당연하게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거울을 대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반성하고 성찰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본다.
- 우리 사회를 기후 악당 사회로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한 바가 없는가?
- 노동을 멸시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무심코 살아 오지 않았는가?
- 돈, 돈 하며, 자본주의 세계 체제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근기(根氣)라는 말이 좋았고, 아주 동감하는 내용이다. 근기(根機)라는 개념은 불교 용어이다. 근기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끈기’라는 말도 바로 이 근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근기에는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氣) 그리고 하근기(下根機)가 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 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근기, 상근기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기의 고비이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기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기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기 사람들을 병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주변에서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기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중근기일수록 더 하지 못한다.
불교 이야기를 좀 더 한다. 절에서 가끔씩 듣는 “성불(成佛)하세요!”라는 말은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서 가장 이롭게 된 상태는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한 것이다. 사실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안아트만)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별도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려는 소망을 현실화하려고 끈덕지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기가 탁월한 상근기(上根機)이다.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용기가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주인공이 되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 이야말로 정말 상근기 정도가 아니라 최상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거사(居士)라고 한다.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성불하려면, 임제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이다.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든지 자신이 주인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절에 들어가지 않아도 일상의 삶 속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을 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자이다.
근기(根氣)는 '근본이 되는 힘'이다. 이 근기가 두텁지 못한 사람, 중근기 사람들은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과실 수확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끝내 그런 이들은 결과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량이 넓은 척할 뿐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중근기의 병자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살았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 정보 기술의 극대화로 하근기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 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어제는 폭설이 내렸다. 온통 대지가 눈으로 덮였다. 토로나-19 바이러스도 눈에 다 파묻혔으면 한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라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오늘 아침 공유한다. 조금 기분 전환하시기 바란다. 시에 등장하는 사투리들은 늘 정겹다. 사진은 한 밤중에 나가 거리를 찍은 것이다. 코로나-19로 고통받는데, 한파에 눈까지 많이 왔다. 그럴수록 희망을 갖고 웃으면 그나마 '살 맛'이 좀 난다.
폭설/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 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이어지는 글은 눈도 오고, 코로나-19로 강요된 혼자 있기에 공부하는 길이 잘 견디는 방법이다. 그런 이야기를 좀 더 해 본다. "사람이 되고자 공부하지 말고 먼저 사람이 되어라"란 말을 g고 싶은 것이다. 언뜻 이해가 안 된다. 먼저 사람이 되라는 말은 무엇일까?
장자가 말하는 진인(眞人), 즉 진실한 사람은 참된 사람이고 '위대한 개인'이다. 그러니 장자는 "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 참된 지식이 있다(유진인 이후유진지有眞人 而後有眞知 )"고 말하였다. 그러니 참된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달라지면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지면 삶에 대한 관점도 달라지며, 그에 따라 사람의 태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 때 학문을 닦아라(行有餘力, 즉이학문)"고 말했다. 유교의 핵심 덕목인 인의여지(仁義禮智)는 그 핵심이 인(仁)이다. '사랑'이 모든 덕목을 아우르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도 인, 의, 예, 지 순으로 하는 것이다. 맨 마지막이 지로, 인의예를 근본으로 한 이후에 배움을 더해야 진정한 학문이 된다고 본다.
이제 알겠다. <논어>의 '학이"를 더 읽어야 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집에 들어와서는 아버지를 섬기고, 집밖으로 나가서는 어른 공경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고 인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되, 이런 몸 가짐을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 때 학문을 닦아라"가 전문이다. 그러니까 학문을 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사람됨의 근본을 실천하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검찰 개혁이었는데, 더 나아가 사법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고시라는 것이 우리 사회의 사람됨을 망쳤다고 나는 본다. 자신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정의감을 잃고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부 이전에 사람이 되는 인성 교육이 절대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다. 단지, 삶에서 먼저 올바른 사람이 된 후에 공부로 뒷받침하는 것이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세태는 출세를 위한 공부를 최우선으로 한다. 다 치열한 경쟁사회가 낳은 산물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지식이라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다만 먼저 사람됨의 근본을 세우라는 권유이다. 지식을 쌓는 공부를 아예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됨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공부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극단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도덕성이 없는 냉혹한 지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똑똑한 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독지(篤志)가 필요하다. 다산 정약용이 문장학을 배우려고 찾아 온 이인영이라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좀 길지만, 평소 우린 이런 글을 잘 안 읽으니, 한 번쯤 천천히 읽을 필요가 있다.
"문장이란 무엇일까? 학식이 안으로 쌓여 그 아름다움과 멋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몸에 윤기가 흐르고, 술을 마시면 얼굴에 홍조가 피어나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어찌 갑자기 이룰 수 있겠는가? 중화(中和)의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의 행실로 성품을 닦아, 공경함으로 지니고, 성실로 일관하되, 변함 없이 노력해야 한다. 사서(四書)로 몸을 채우고, 육경(六經)으로 식견을 넓히며,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화에 통달해야 한다. (…) 지금부터 문장학에 뜻을 끊고 서둘러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라. 안으로 효우의 행실을 돈독히 하고, 밖으로는 경전 공부를 부지런히 함으로써 성현의 바른 말씀이 언제나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과거시험도 준비해서 앞길을 열고, 임금 섬기기를 바라도록 하라. 그리하여 태평한 시대의 상서로운 인물이 되고, 후세의 위인이 되어야 한다. 경박한 취미로써 천금 같은 몸을 가볍게 버려서는 안 된다. 진실로 자네가 고치지 않는다면, 차라리 노름질이나 술집에서 노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우리는 기본에 너무 충실하지 않다. "서둘러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라." "경박한 취미로써 천금 같은 몸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노름질이나 술집에서 놀아라." 위의 글에서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주역)>을 말하고, 여기에 <춘추경(춘추)>과 <예경(예기)>를 더하면 사서 오경이고, <악경>을 포함하여 사서육경을 말한다. 이 사서와 육경 그리고 역사 책을 공부하는 것은 지식의 근본을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얻은 배움을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문장은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 그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근본을 든든히 하지 않고, 행함을 통해 확신을 얻지도 않고, 세상의 경륜도 쌓지 않은 채 문장의 기교만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겉멋에 불과 하다. 작가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에게 통하는 말이다. 최진석 교수는 여러 번 말했다.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본’이다." 그러면서 늘 이렇게 주장한다. 누구나 기본만 갖추고 있으면, 세속적인 일에서나 영적인 일에서나 모든 일을 잘 이룰 수 있다.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기본’이 없이 하는 일은 어떤 것도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기본 가운데 기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바로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려는 문을 연다는 뜻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근본 질문 옆에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몇 개의 질문들이 포진한다.
-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이 근본, 기본을 공부하는 것을 우리는 '철학 한다'고 한다. 철학은 인생과 세계에 탐구이다. 위에서 말한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는 언제 창조되었는가?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등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원초적으로 철학적 존재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자신의 삶에서 철학을 치워버리고 질문을 하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진부해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나 지루하고 쓸데 없는 주장 따위는 한갓 종이와 먹을 낭비하는 것이다. 직접 진귀한 과일이나 채소를 심어, 먹고살 도리를 넉넉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가벼운 잔재주나 인기에 영합하는, 헛된 재주, 쓸데없는 주장을 펼치는 학문이나 예술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이렇 바에는 차라리 농사를 지으라는 것이다. 농사 짓는 것을 깔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농사를 지으면 살림살이가 넉넉해 지지만, 헛된 공부는 종이와 먹은 물론 소중한 시간도 날려 보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공부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데는 자격이 필요하다. 진정한 공부는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 어떤 지식도 삶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그러니까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공허하다. 명성과실(名聲過實), 명성은 높으나 실속이 없는 사람이 바로 이들이다. 머지않아 실속 없는 내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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