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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왜 미혼모는 있고 미혼부는 없을까?

1501.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8일

 

오늘 아침은 가족 바깥에서 '정상'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야기를 하려한다. 미혼모는 있는데, 왜 미혼부는 없는가? 왜 해외 입양으로 아이를 수출하는가? 한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본다.

 

  1. 미혼모는 있고 미혼부는 없을까?

 

우리 사회는 저출산 문제가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1 3일 행정안전부는 대한민국의 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했다는 통계를 내놨다. 그런데, 아이들을 아직도 버린다. 통계에 의하면, 버려진 아기들의 대부분은 미혼모들의 아기들이라 한다.

 

벼랑 끝에 모린 미혼모가 영아유기라는 범죄를 저질렀을 처벌은 여성만 받기 때문이다. 현행법이 직접 아이를 버린 행위를 사람만 처벌하기 때문이다. 친부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지만 도움을 거절당해 아이를 유기했을 때도 친부는 법적 책임이 없다. 아이는 남녀가 함께 있어야만 만들 있는데, 여성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되는 걸까?

 

우리 사회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고들 하지만, 미혼모와 자녀를 '비정상'으로 바라보며 멸시하는 문화는 아직도 여전하다. 생각과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출산의 합법성을 결혼 제도 내에서만 인정하는 가족주의가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미혼모는 그런 가족규범의 일탈자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게 미혼모가 양육을 선택하지 못하고 아이를 버리게 되는 이유이다. 출산은 가부장적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야만 정상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벗어나면 비정상과 부도덕으로 몰아세우는 한국의 가족주의가 이유이다.

 

그리고 한국의 가족주의 때문에 대개의 부모들은 결혼하지 않은 딸이 임신하면 딸을 보호하기보다 가족의 수치로 간주하고 낙태나 입양을 종용한다. 문제는 미혼모가 혼자 고생을 하는 동안 미혼부는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미혼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성관계는 임신, 축산, 육아까지 이어지는 고민을 안겨주지만, 많은 남성들에게 성관계는 그저 욕망 뿐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가족주의는 매우 남성 편의적이다.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 문제는 차치하고, 임신 단계에서 미혼 임산부에게 미혼모가 받을 있는 지원, 관련 정책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비밀을 보장해주며 상담하는 콜센터 같은 지원이 절실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그런 제도가 없다. 웃긴 것은, 한국은 아이를 직접 키우는 미혼모보다 아이를 버렸을 아이를 대신 키우는 사람에게 많은 지원을 한다는 점이다. 이이를 원래의 가정에서 분리하는 것은 모든 방법을 써본 가장 마지막에 선택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아이 버리기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아이를 버리는 주범은 미혼모 라기보다 이른바 정상 가족이 아닌 다른 삶은 잘못되었다고 차별하고 배제하면서 교육 받을 권리와 일자리까지 위협하는 한국의 가족주의가 문제이다.

 

이런 미혼모의 차별은 아이에 대한 차별이다. 미혼모의 권리가 아동의 인권이기 때문이다. 성인과 달리 취약한 특징을 가진 아이들의 인권에 있어서는 부모의 지위에 대한 차별이 아이에 대한 차별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인권을 위해서라도 미혼모 가정이든 입양아 가정이든 재혼 가정이든 동성 가족이든 가족의 형태를 불문하고 모든 가족 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누릴 혜택과 권리, 그런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양육자에 대한 지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한다. 최근 크게 문제가 되는 출산과 연계해 보아도 미혼모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일은 아주 시급하다.

 

출산율이 높은 나라들을 보면 혼외 출산 비율이 높다. 통계를 , 프랑스 혼외 자의 출산 비율이 56,7% 높고, 출산율도 1,98 OECD 최고 수준이다. 그럴까? 이유는 혼외 출산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없고, 양육을 지원하는 정부 정책이 도덕적 판단 따위와 무관하게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모가 있는 가정보다, , 양육의 동시 유지가 아무래도 불리한 미혼모가 가난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작업 교육, 훈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보육 시설 이용에서도 우선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지를 사회투자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따뜻한 시를 공유한다. 다음은 아이의 입양 문제, 특히 수출하듯이 하는 해외 이양의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우리는 입양의 여러 문제점을 모른다. 사건이 터져야 정부는 관심을 쏟는다. 특히 입법기관고 국회의원들은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을 보듬는 일을 적극적 해야 한다. 모두 선거에만 신경 쓴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날씨는 최강 한파이다. 이렇게 추운 날은 박노해 시인의 < 겨울의 > 생각난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그 겨울의 시/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 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산의 새끼 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계속해서 가족 바깥에서 '정상'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야기를 한다. 해외 입양으로 아이를 수출하는가?

 

조심해야 것은 양육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아이는 무조건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핏줄' 강조하고, 모상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를 키울 없게 미혼모는 혈육을 버린 사람들이라고, 의붓부모나 입양부모는 남의 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이라고 멸시하고 차별하는 '핏줄 강박' 되어서 된다. 중요한 것은 엄마의 양육이 좋고를 떠나서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스스로 선택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입양 이야기를 시작한다. 입양아는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양된 일부 아들을 사지에 몰아넣는다. 요즈음도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우리 사회는 성공한 입양인은 덥석 끌어안고 환호하고(프랑스 장관이 플뢰흐 펠르랭), 불운한 입양인은 부적응자 취급을 한다.

 

우리 사회는 가장 오래, 가장 많이 해외 입양을 보낸 나라이다. 최근 2016년에도 해외입양 아이가 334명으로 거의 매일 아기들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갔다. 2020 통계는 모른다. 속상하다. 한국 전쟁 직후 한동안 전쟁고아와 혼혈아가 주로 입양되었다. 1970년대에는 미혼모의 자녀가 입양의 주류를 차지하다가, 1980년대에는 입양이 산업화되면서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정착됐다. 미혼모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이미지화 되면서 평범한 어머니일 있는 기회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바탕에는 결혼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결합만 가족이며 틀을 벗어나면 해외든 국내든 입양을 통해 아이에게 제대로 가족을 찾아주는 좋다는 인식, 강력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입양 제도가 문제였다. 입양절차와 제도 운영의 책임을 공공 기관, 국가가 아니라 민간이 맡고 있다. 법을 재정비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해외든 국내든 아이를 이양 보내겠다는 뜻을 밝히는 순간부터 아이는 전적으로 민간 입양기관의 관리하에 놓이게 된다. 낳아준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아이들이 입양 과정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들여다보면 정말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 엉망이 아닌 없다.

 

현재 거의 모든 아이가 병원에서 태어나는데도 병원에서 바로 신고가 이뤄지는 보편적 출생신고제가 아직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래 영아 인신매매와 인터넷 불법 입양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미혼모가 불가피하게 아이를 직접 키울 없는 상황이라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어떤 자방자치 단체들은 이게 자기 일인 모른다. 절차도 둘로 쪼개져 있다. 위탁 가정, 보육원, 공동생활가정에 가게 되는 경우는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지만 입양은 생부모가 곧바로 민간 입양 기관에 찾아가야 한다. 민간 기관이 책임지는 , '아동의 최선의 이익' 모든 것에 우선하는 공공성이 보장될 일이 없다.

 

입양부모들에 사전 교육도 매우 부실하다. 8시간 일회성 교육이 전부다. 예비 입양부모에게 입양은 부모의 이익이 아니라, 아동 최선의 이익을 위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그걸 내용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것은 민간 입양에는 사후관리가 없다. 해외 입양의 경우, 한국 정부가 아이들의 국적 박탈만 신경 쓰고 입양 국가의 국적 취득 문제는 도외시하여, 아직도 해외에 무국적 상태로 남아 있는 입양인들이 많다고 한다.

 

입양 가족은 생부모와 함께 없게 아이에게 사회가 만들어준 대안 가족이다. 그렇게 가족을 만들어준 책임이 있는 만큼 입양의 시작부터 , 이후까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지금처럼 정부가 입양을 민간 기관과 입양부모의 선의에 맡겨 두고 방치하는 것은 아이를 정성껏 돌보고 있는 입양부모들에게도 커다란 누를 끼치는 일이다.

아침 마지막으로 공유하고 싶은 내용은 한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통계에 의하면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20 명이 넘고 외국인의 수는 200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주민, 특히 피부색이 검고,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 출신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심각하다. '혈통의 한국인'들이 '정상 가족' 되어 '비정상' 해당하는 다문화가정, 이주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를 차별하는 것이다. 한국은 분명 인종차별 공화국이다.

 

우리 모두 반성할 일이다. 특히 무심코 내가 말들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가끔 나도 흑인을 만나면, 실제 말은 뱉진 않지만, 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정말 새까매", "흑형". 그리고 주변 사람들 중에는 서슴지 않고 이주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러워", "냄새가 ". "미개해", '게으르면서 밝혀", "남의 나라에 와서 일자리를 빼앗아", "잠재적 테러리스트", "아이를 낳으려 팔려 불쌍한 사람" 등이다.

 

그들은 스스로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거나 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 한국에서 살게 이주아동일 뿐이다. 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반인륜적 죄이다. 인문운동가로 나는 인종 차별, 차별 그리고 지역 차별을 3 인륜적인 죄라고 본다.

 

통계에 의하면 국내의 미등록 이주아동은 대략 2 안팎으로 추정된다.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주민의 아이들은 학대를 당해도 아동보호전문기관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없는 상황이 되었을 시설에도 가지 못한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주민의 아이들이 단지 국적과 체류 자격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상적인'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군다. 교육,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 폭력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어서 제도를 보충하여야 한다. 아직도 '차별금지법' 우리 국회에는 계류 중이다.

 

주변의 말을 들어보면, 이주민에게 실제로 피해를 당한 경험보다는 미등록 이주 아동의 기본권 보장에 대해서 '세금이 아깝다' 논리를 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미등록 이주 아동의 부모들은 한국에서 일하며 사는 이상 지역 경제의 부분을 맡고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다, 그리고 간접세의 비중이 50% 육박하는 한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생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위험 전가, 희생양 찾기, 타자 비난의 가장 흔한 형태이다. 이유는 그만큼 불안과 위기감이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인권이 하찮고 허무맹랑한 가치로 취급 당하며, 잘못된 정보에 기반을 증오가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증폭되는 사회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과장된 공포가 더욱 쉽게 확대 재생산 된다. 다시 고민을 하여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 '정상적 한국인'들이 '비정상'이라고 딱지를 붙인 대상, 타자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점점 배타적이 되어간다.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구분하는가? 따져 일이다. 일요일 아침에 문제를 살펴 본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김희경의 , <이상한 정상 가족> 2 "한국에서 '비정상; 가족으로 산다는 " 읽고 생각을 첨가하며 정리한 것이다. 시기에 우리가 다시 생각할 거리를 많이 김희경 작가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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