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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산다는 것은?

1503.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10일

 

읽고 쓴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고, 통쾌한 일이다. 문장을 만나서, 나는 바로 독서(讀書)라는 말을 생각했다. 구글에 독서를 치니까, "책이나 글을 읽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나는 그것보다 '읽고 쓰는 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심신을 수양하고 교양을 넓히기 위하여 책을 읽는 행위' 정의한다. 한자를 찾으니, 읽을 '()'자에 '()'자라고 한다. () 자에는 '쓰다'라는 의미도 있으니. 글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쓴다' 나는 바꾸어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쓴다는 것의 통쾌함을 몰랐다. 지난 3 전부터 아침마다 일어나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하나> 글을 하루도 빠짐 없이 썼더니 글쓰기가 어렵지 않다. 습관이 되었고, 쓰기 위해 책들을 열심히 많이 보게 된다. 그래 심신도 많이 수양 되었고, 교양도 넓어지고, 우선 마음이 평화롭고, 몸도 건강하다.

 

고미숙의 책을 읽고 확신을 가졌다. 읽고 쓴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고, 통쾌한 일이라는 것을. 그게 인문 활동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에 내가 원하는 정보들이 많아,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기가 훨씬 용이해 졌다. 우선 두꺼운 사전과 백과사전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검색이 쉬워졌다. 물론 많이 읽고 쓰다 보니, 잘못된 정보를 골라내는 능력도 늘었다. 그리고 검색 요령이 많이 생겼다.

 

고미숙은 말한다.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읽지는 않고 쓰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읽었으니 쓰고, 읽어야 한다. 그건 영화를 보지도 않으면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나 () 마찬가지이다. 쓰기와 읽기는 둘이 아니다." 그래 나는 독서라는 단어의 정의를 '읽고 쓰는 행위'라고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고미숙의 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양생과 구도, 그리고 벌이로 서의 글쓰기". 그래 나도 글쓰기란 나를 살리는 일이고, 길을 찾아 건너 가며 구도하기를 하는 일이고, 밥을 먹게 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아직 나는 글쓰기로 밥벌이는 못하고 있다. 대신 매일매일 성찰할 거리를 아침마다 2000명에게 무료로 공유하다 보니 일정한 팬이 생겼고, 밥벌이인 와인 장사에 도움이 된다. 가끔씩 좋은 와인을 공동 구매하면, 모르는 사람들인데, 나를 믿고 구입해 준다. 고마운 아닌가?

 

연일 날씨가 최강 한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동네 커뮤니티 공간에 들렸더니 창문에 오늘 아침의 사진 같은 성에 꽃이 피어 있었다. 성에 꽃은 겨울철에 창밖의 기온이 매우 낮을 창유리의 실내 면에 공기 중의 수증기가 승화하여 아름다운 모양의 결정이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꽃을 보면, 나는 최두석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좋은 시이다. 올해는 코로나-19 버스를 기회가 없어 성에 꽃을 만날 없었다.

 

살면서 만나는 인연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인'보다 '연'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적인 원인인 '인'이 발생하면, 간접적인 조건인 '연'은 내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치열한 자기수행이라는 원인과 좋은 스승이라는 조건이 갖추어 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살아서 인간이 살아낼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성에 " 그렇다. 성에 꽃은 안의 습기와 당시의 온도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특정한 온도나 특정한 습기가 변하면 지금 보고 있는 성에 꽃이 사라지듯이, 인연이 맞아서 무엇인가 생기는 것이고, 인연이 다해서 무엇인가가 소멸할 뿐이다. 이것이 ‘공’ 이론이다. "성에 " 자체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성에 꽃/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설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

어제 이 버스를 탓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지적 인식을 위해 지금까지 개발 것으로 독서가 최고라 했다. 책이나 좋은 글을 읽는 것이다. 최교수는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닦을 있는 것이 독서"라고 강조한다. 문제는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내용을 요약하거나 마음에 닿는 글을 적으면서 읽어야 한다. 그런 것을 최교수는 '인격적인 단련'이라 한다. 나는 그냥 '사는 훈련', '자기-수련'이라 말하고 싶다. 훈련은 우선 시간을 들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적인 수고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나르( Pascal Quinard) 의하면,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에서,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 비유했다고 최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소개했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나아간다는, 진화 또는 진보는 용기로 빚어진다고 했다. 프랑스어로 ' 꾸라쥐(Bon courage)' 그대로의 뜻은 "용기를 !'이지만, ' !" 말이다. 용기는 힘을 내는 것이다. 충청도 말로는 '욕보는 '이다. 그건 용기를 내어 시도하고 시간을 들이며 인내심으로 힘을 내는 일이다. 용기가 힘든 것은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편안함을 박차고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하여,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탈주하여, 나아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일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키우고 강화하는 일로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많게는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옮겨 가면서 일어난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본다. "모든 진화는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탐험을 떠나는 용기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은 없어서 불안하고 무섭고 이상하다. 거기는 두려운 곳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자면 두려움을 뒤집어쓰지 않을 없다. 이렇게 하여 모든 진화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만 일어난다."

 

나아지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갖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정처(定處) 정하고, 마치 선정(禪定) 듯이 여기에 편안해 하고 여기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이것을 자신만의 진리의 텃밭으로 삼는 , 이것 다음이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닿기 힘들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장자가 말하는 '정해진 마음(成心)' 갇혀, 이것에 맞는지 여부에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 감정만 갖게 된다. 그러면 깊이 생각하는 수고를 필요가 없어지고,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빠지게 된다. 점이 아주 중요하다. 감각에 빠지만,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좋고', '나쁨' 있게 된다. 사유에는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래야 지성이 성장한다. 지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쾌락에 빠진 사람들을 최교수는 게으른 자라고 말한다. 부지런한 자는 감각과 감정을 극복하는 지적인 태도로 사유할 알면서 지성이 빛난다.

 

나는, 여기에, 쓴다는 행위를 덧붙이고 싶다. 나는 고미숙의 책을 통해, 사람은 쓰는가? 쓴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본성과 쓰기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등을 배웠다. 글쓰기의 근본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에서 만난 "뭐든, 근본에 닿아야 삶의 기술로 운용할 있다" 때문에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의 '-라이팅' , 우리 모두와 함께 공유할 생각이다.

 

고미숙에 의하면, 말장난 같지만, '산다' 것은 '선다' 것이라 했다. (산다=선다) 우리는 발로 서는 데서부터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의학에서 직립에 필요한 척추를 '럼버커브' 한다. 이건 태아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터득하는 능력이라 한다.

 

서는 직립과 함께 사람은 손이 해방된다. 그러니까 선다는 것은 발은 땅을 디디고 눈은 하늘을 응시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발에서 벗어난 손이 하는 일은 무궁무진해 진다. 여기서부터 사람이 짐승과 달라지는 출발점이다. 손이 하는 일은 하늘과 , 머리와 다리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이자 네비게이션이다.

 

다시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선다는 누구든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발로 몸을 지탱하는 , 자립(自立) 의미한다. 나는 자립에 방점을 찍는다. 다으멩 자립에 관한 글을 생각이다. 그리고 자리에서 걸어 나가면 된다. 그게 인간의 길이다. 여기서 자립은 의식주를 홀로 감당하는 동시에 스스로 인생의 지도를 그려 가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걸 '생활의 자립과 인식의 지도'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인식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이다. 인식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발로 서려면 삶의 비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생활의 자립 그리고 생사를 관통하는 인식의 지도가 없이 발로 서기는 불가능하다. 자립 그리고 그것을 위해 쓰기가 삶의 확실한 '럼버커브' 있다.

 

나는 그냥 사람이 인간이 되려면, '사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미숙은 산다는 것은 제일 먼저 '하늘과 사이에 존재한다' 뜻이라 했다. 발로 서계 되면 시선은 하늘, 무형의 세계를 바라보되 다리는 땅에 안착해야 한다. 땅을 디딘 하늘을 응시하는 존재, 이게 인간이라 했다. 하늘은 무한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인식의 지평이 된다. 그래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인식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땅의 두터움과 하늘의 가없음을 동시에 누릴 우리의 삶은 비로소 충만해 진다고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충만함을 위해 사람은 서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이(간격)가 존재해야 한다. 동시에 한자 그대로 사이() 존재로 지속적으로 주변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래 우리들의 삶은 삼간(三間),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사람(人)자 뒤에 간(間)이 붙는다. 그 인간(人間)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속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이 '간'을 우리 말로 하면 틈, 사이, 간격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원 시간 속의 짧은 틈과 무한한 공간 속의 좁은 틈을 비집고 태어나, 사람들 틈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돌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이것을 '삼간(三間)'이라 한다. 그러니 살면서 우리는 그 시간의 틈을 즐겁게, 공간의 틈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람 사이의 틈은 사람 냄새로 채우면서 살아야 인간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