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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종교(宗敎)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코로나는 중국에서 전파된 질병"이라며 "그 지병의 최대 피해자는 신천지라는 점을 국민들이 인지 해주길 바란다." 신천지가 밝힌 자신들의 입장 일부분이다. 여러 호텔이 기자회견 장소를 대여해 주지 않아 유튜브 채널 방송으로 기자회견을 대체했다고 한다.

슬픈 일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슬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싶은 아침이다. 소설가 백영옥은 언젠가 자신의 칼럼에서 이런 문장을 소개한 적이 있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 )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슬픔에 빠진 이에게 입증할 수 없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 (… ) 예를 들어 누군가 '그분은 더 좋은 곳으로 가셨어요'라고 한다면, 이때 이 사람은 밧줄의 반대쪽 끝을 잡고 있지 않은 것이다. (…) 반면 '밤새도록 휴대전화를 쥐고 있다가 당신 전화번호가 뜨면 언제라도 받을게요'라고 말해준다면 한결 더 낫다. 이는 그 사람이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또 할 수 있는 일이다. 신뢰해도 되는 밧줄이다." (론 라마스코, 브라이언 셔프『슬픔의 위안』)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전할 위로의 방법을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소설가 백영옥은 이런 질문을 한다. "상자를 묶는 데만 밧줄을 사용한다면 튼튼함을 쉽게 의심하지 않겠지만, 그 밧줄에 의지해 만약 절벽에 매달려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절망과 슬픔에 빠진 사람은 밧줄 하나로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말이 튼튼한 밧줄일까. "시간이 약입니다." "괜찮을 거예요"처럼, 상투적이거나 확인할 수 없는 말보다 그를 위해 차 한 잔을 끓이거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처럼,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가만히 기다려주"거나, "그가 잠시 웃으면 같이 웃어주고/대책 없이 울면 같이 울어주는" 게 나을 수 있다. "인디언 말로 친구란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슬플 때는 지킬 수 있는 작은 약속이 지킬 수 없는 큰 약속보다 낫다."(백영옥)

신천지는 자신들의 신자들에게는 밧줄을 던지지 않았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배철현 선생이 내린 종교의 정의를 외우고 있다. "종교는 교리나 건물이 아니라, 단명을 사는 인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안타까워하며, 지금-여기에서 자신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발견하여, 주위 사람들과 함께 공생하는 기술이다." 다음 문장을 우리는, 조금 어렵지만, 꼼꼼하게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영어로 ‘릴리전(religion)'이란 용어를 일본인들이 수용하여 한자로 ‘종교(宗敎)’
로 번역하였다. ‘마루’ 종(宗)자는 인간이 정성스럽게 드리는 제물에 찾아오는 신을 확인하고, 그곳에 갓머리를 덮어 사당으로 만든 특별한 장소다. 일본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신주 모시던 신을 알현하기 위한 일련의 가르침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도 스스로 생각하고 자립할 능력이 없다면, 자신이 어릴 때부터 '우연히' 노출된 종교를 수용하고, 그 종교관과 세계관으로 세상을 본다. 우리가 각자가 ‘진리’라고 만든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그렇듯이, 종교도 개별 교리에 집착하여, 그 핵심인 포용성을 포기하고 배타성을 선택하고 있다. 여기서 '포용성'이란 다름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축하할 대상으로 여기고, 다름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려는 용기다. 반면 '배타성'이란 상배당의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여, 비하하거나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인도하려는 오만이다. 집단 내에서 자기 비판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 집단은 포용적이기보다 배타적이다. 그래 그 조직은 부패하고, 눈이 멀어 판단을 잘 하지 못한다.

오늘 시처럼, "슬픈 사람들은/슬픔의 집 속에만/숨어 있길 좋아해도/너무 나무라지 말아요/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위로입니다." 예수는 산상수훈의 팔 복 중 두번째 복을 이렇게 말했다. '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할까? 하느님이 위로를 해주시기 때문이라고 고 차동엽 신부님은 답을 주시며, "슬픔은 비와 같다. 장미꽃을 피울 수도 있고, 진흙탕을 만들 수도 있다. 슬픔도 선택의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슬플 때는 그 슬픔을 하느님에게 맡기면, 놀라운 위로와 힘이 생긴다고 한다.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난 이 말씀에 동의한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슬픔의 끝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위로는 슬픔의 크기와 비례한다. 그리고 나는 일상에서 극심한 슬픔이 닥쳐도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류시화 시인에 의하면,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 즉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 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상처보다 더 크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축복이라는 영어 blessing은 프랑스어 blesser에서 왔다. 프랑스어 blesser는 '상처 입다'란 뜻이다.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땐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빗 속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가 하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에게 들은 말이다. 너무 위축된 일상 보다는 그래도 일상의 춤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 기회에 이 길을 실컷 걷는다. 거기서 찍은 사진을 오늘 아침 공유한다.

슬픈 사람들에겐/이해인

슬픔 사람들에겐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마음의 말을 은은한 빛깔로 만들어
눈으로 전하고
가끔은 손잡아주고
들키지 않게 꾸준히 기도해주세요

슬픈 사람들은
슬픔의 집 속에만
숨어 있길 좋아해도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위로입니다
그가 잠시 웃으면 같이 웃어주고
대책 없이 울면 같이 울어주는 것도
위로입니다
위로에도 인내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 함께 배워가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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