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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7월 4일)

어제는 태양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싶어 했다. 작렬하는 태양은 10분을 걷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른 저녁에 내리 쏟는 장마비가 그 뜨거운 열기를 단 번에 식혔다. 그 장대비를 즐기며, 나는 2019년 이후 거의 3년 만에 딸과 영화관에 갔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신세계 백화점 메가박스에 딸이 예매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집 근처의 그 백화점, 그 영화관은 처음이다.

잘 만든 영화였다. 여러 측면에서 말이다. 인문 운동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 온 대사는 공자의 이야기였다. 이 영화는 아주 구조적이었다. 첫 번째가 산과 바다의 대립이다. 작중 인물 서래(탕웨이)는 <<논어>>를 인용한다. 스마트폰에 말하면, 앱이 동시통역한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중국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 지혜로운 자는 물, 즉 바다를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를 인용했다.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흐르며 수시로 변하고 또한 지혜로운 서래는 바다이며, 자신의 심지가 굳건하며 단단히 서있는 어진 인간 해준(박해일)은 산과 같다. 오늘 아침 사진의 두 포스터도 두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각자의 배경이 서래는 바다, 해준은 산이다. 더 말하면 스포이기 때문에 내용은 여기서 멈춘다.

"지자요수, 인자요산"" 이야기를 좀 더 한다. 여기서 '樂'은 '즐길 낙'이 아니라, '좋아할 요'로 읽어야 한다. 이 문장은 <<논어>> '옹야'편에 나온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子曰, 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지자요수, 인자요산, 자자동, 인자정, 지자낙, 인자수)." 공자는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 할 줄 알고, 어진 사람은 오래 간다."

주희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지혜로운 자는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흐르고 정체하는 바가 없어 물과 비슷하니 물을 좋아한다 한 것이고, 인자로운 사람은 원칙을 지키듯 제 자리에 머물러 진중하고 옮기지 않아 산과 비슷함이 있으므로 산을 좋아한다 한 것이다." 사실 지혜로운 사람은 상황판단이 빠르고 판단력이 높다. 어딘 가에 정체되지 않고 막힘이 있으면 돌아가며 처신하고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흐르는 물처럼 역동적이다. 아울러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것들을 보고 접하며 이를 또 다른 지식과 지혜로 승화시키는 것을 즐겨한다. 그런 지혜로운 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움직임, 즉 동(動)과 즐거움, 낙(樂)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어진 사람은 스스로 마음의 중심을 잡은 다음에도 그 상태를 편하게 여겨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사람이다. 금방 일희일비하거나 눈앞의 이익을 위해 거동하지 않는다. 내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그 손해 때문에 마음의 중심을 쉽게 흩뜨리지 않는다. 그러한 무거움이 어진 인자의 덕목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어진 사람은 고요, 정(靜)하며, 그런 고요함을 편히 여기기 때문에 오래간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죽음이 벌어지는 장소는 각각 산과 바다이다. 영화의 전반은 '산'인, 해준이 서래를 관찰하며 1인칭에 가까운 시선으로 진행되지만, 후반에는 '바다'인 서래가 해준을 관찰하며 그녀의 주도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전반은 산이 붕괴하며, 후반은 바다로 침잠하며 끝이 난다. 그런데 산과 바다에 해준과 서래를 연결시키고 있다. 영화의 앞 부분에서 바다가 좋다는 서래에게 해준은 "나도"라는 말을 남긴다. 그 순간 산과 같은 해준은 서래라는 바다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하고 있기에 그런 부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것 또한 영화를 보는 재미이다.

이 영화는 유혈이 낭자하지 않아도 스릴러를, 자극적인 노출 없이도 농밀한 멜로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의 교과서가 될 것으로 본다. 수사극이라는 수식이 무색하게 두 남녀 주인공은 오감을 공유하며 사사로운 일들을 펼쳐나간다. 이 영화에서 유독 부각되는 것은 시선과 언어 그리고 호흡이다. 그리고 멜로물로, 복수심, 강박 등 병든 내면을 탐미적으로 해부하는 감독은 품위 있는 성정과 사회적 족쇄에 묶인 사람의 처참한 경로를 또 한번 황홀하게 따라간다. 영화는 차마 감지 못한 시신의 눈, 스마트폰 화면의 액정 등을 이용해 하염없이 흔들리는 얼굴을 엿본다. 한편 뜻이 통하지 않을 때도 각자의 언어를 천연덕스레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는 스마트폰 번역 앱, 전자시계를 통해 소설적 감흥도 돋운다. 디지털 기기로 발생한 소통 양식과 연화 문법 사이에 절묘한 접점을 시도한 것이 새로운 영화의 교과서가 될 것 같다.

슬픔 앞에서 물에 잉크가 번지듯 서서히 반응하는 이가 있다면, 사랑 앞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천히 젖어 드는 사람에게도 마침내 파도는 친다. 이 영화는 거센 사랑의 파도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파도가 몰아치는 만조의 경지로 미결된 사랑 앞에 장탄식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나는 영화관을 나오면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떠올렸다. 계절에 맞지 않는 시이지만, 오늘 아침에 공유한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었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영화 속에 실제로 이런 대사가 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지만, 잉크가 물에 떨어지듯 서서히 퍼지는 사람도 있어." 해준이 타인을 묘사하듯이 자신에 관해 이야기는 대사이다. 실제로 이영화를 보고 나오면, 파도처럼 뭔 가가 밀려오지만, 결국에는 잉크처럼 서서히 물들어가는 영화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영화는 완벽한 짜임새가 남긴 지독한 여운이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언제 인지도 모르게 스며든 두 주인공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금기시되는 관계의 불붙는 사랑이 아닌, 감정을 억누르면서 서서히 커져가는 어른들의 사랑에 초점을 뒀다. 진한 스킨십보다 한 번의 눈빛이 더 강하다는 걸 강조한다.

이 영화는,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인생을 알만큼 알고 파고를 넘나들어본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랑과 인생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두 주인공 역시 많은 부분에서 능숙하지만은 않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애써 부여잡아 보지만 관객들에게도 마음의 요동이 전해진다. 의심과 관심을 오가는 관계 변화나 수사극과 멜로로 드라마의 조화도 신선하다. 이 영화의 박찬욱 감독도 언론시사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젊을 땐 자기 감정을 다 드러내고 표현해 가면서 살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면에서 솔직해지지 어려워진다고 볼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 자기의 처지에 따라서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게 많고 참아야 할 것도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며 "그런 형편에 놓인 두 사람이 어떻게 하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기 감정을 전달할까. 참기가 힘든데 이 감정을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들키지 않고 감출까를 고민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서래는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은 시작됐다"고 말한다. 박 감독은 "사랑이라는 게 어느 순간 라이터 불을 켜듯 확 생기는 게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털어 놓았다.

나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이동진 영화 평론가의 말을 듣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영화에 6년 만에 평점을 만점(5점)으로 주며, "파란색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 옷처럼, 미결과 영원 사이에서 사무치도록"이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 받은 구조는 색의 대립이다. 이 영화는 일정한 색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초록과 파랑 그리고 붉은 색의 대립이다. 초록은 산, 파랑은 바다를 의미하며 두 인물이 뒤섞이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조용히 숨어있던 붉은색은 이 세계가 충돌하고 흔들리는 순간에 고개를 쳐든다. 이 문제는 내일 더 이어간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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