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집착하면 도망간다.

240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6월 29일)
지난 주말에 읽은, 앤드류 매튜스의 <<마음 가는 대로 해라(follow your heart)>>의 책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사람이든 돈이든 무언 가에 집착하는 순간, 그것이 우리를 거꾸로 옭아맬 것이다. 더 나아가 무언가를 소유하면, 그 소유에 우리는 다시 소유 당한다. 인생의 중요한 덕목은 모든 것에 감사하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집착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우선 오늘의 시를 공유한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알프레드 디 수자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집착하면 도망간다. 일상에서 우리가 쫓는 것은 항상 도망치려고 한다. 거래나 해프닝 따위에 감성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절실하게 바라면, 우리 자신이 가로막기도 한다. 동전의 이면이라고 할까? 좀 가라앉히고 기다리면 때가 온다. 무언가를 절실히 원할 때마다 역으로 그걸 밀어내는 에너지를 발산하면 기다릴 수 있다. 초연하면서 동시에 단호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노력과 능력이 결국에는 보상받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이기지 못했다면 다음번에 이기면 될 일이야. 그 다음번도 있고." 초연함은 무관심이 아니다. 무언 가에 연연할수록 오히려 지배력을 상실한다. 대개 사람들은 돈에 매우 사로잡혀서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초연함 때문이다. 부자와 거지의 입장 차는 명백하다. 전자에겐 돈을 벌 거란 믿음이 있고, 후자에게는 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하지 않으려면, 마음 가짐을 바꾸는 거다. '행복하기 위해 ~이 필요해요'라는 말이 주는 함정에 유의하는 거다.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자연법칙을 따른다. 자연은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 자연은 조화를 추구하는데, 우리는 절박하면서 동시에 조화로울 수 없다. 삶을 끝없는 투쟁으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흘러가는 대로 두자. 무관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강요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순리대로 풀자. 집착하면 도망간다.
 
대신 무언가를 받길 원한다면 줘야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주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게 된다. 집착이 우리 삶으로 굴러 들어오는 복덩어리를 가로 막는다면, 집착의 반대말인 '집착하지 않기'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의 일부를 내주는 것이다. 베푼 것은 다시 되돌아온다. 통장의 잔고가 풍족함을 나타내지 않는다. 풍족함은 삶을 통해 순환하여야 한다. 부(富)는 주고 받음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통장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쓰지 않는다면 부자라고 할 수 없다. 베풂의 비결은 되돌려 받을 생각 없이 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고 준다면 결과에 집착하느라 되돌려 받을 가능성이 적어진다. 물질적인 소유를 즐겨도 되지만, 주의할 것은 가진 바를 확실히 하되 물건이 나를 소유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한 부자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얼마나 없는가'에 집중하기 보다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느낌'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상황이지만, 없다는 생각,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지금을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이런 것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면서 살 수도 있다. 이러한 '있다'는 감사한 느낌을 온전히 자주 느낄수록 좋은 운과 인연이 찾아온다.
 
남녀 관계도 그렇다. 집착하는 연인은 매력적이지 않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그들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있고 싶은 곳에 있을 자유를 주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내 삶에 초대하는 일이지만, 초대에 응하는 것은 그의 선택이다. 오늘 아침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 혹은 어떤 사람을 원하다면 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증오도 일종의 집착이다. 증오하는 데 온 힘을 쏟다 보면, 상황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몸과 마음만 녹초가 된다.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감정이 정돈되고, 그러고 나서야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수용은 포기가 아니다. 수용이란 상황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저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현실로 바꿀 수 있다.
 
내려놓음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물처럼 흐른다. 나만이 완수할 수 있는 고유한 임무를 인도인들은 '다르마'라고 한다. 그게 중국으로 와서 '법(法)'으로 번역 되었다. '법'이란, 강물의 물처럼,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버리며 당연하게 그리고 도도하게 나아가는 삶의 규범을 말한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이, 자신의 '다르마(고유한 임무)'를 발견하고 발휘한다면 행복하다.
 
불교는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진여(眞如)나 여여(如如)의 경지를 강조한다. 불교는 극단적으로 두 가지 마음에 대해서 설명한다. ‘집착하는 마음’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 극단적 두 마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삶을 산다. ‘집착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불만족과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은 우리의 삶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다는 거다. <<대승신기론>>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하나 뿐인 우리 마음에 두 가지 양태, 즉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이 있다.” 이 말은 '집착하는 마음'도 내 마음이고,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도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진여문을 무관심한 마음 혹은 죽은 마음과는 구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집착'이란 자신이나 타인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외모만 보느라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망을 통해 존재하는 인연(因緣)의 존재이다. 진여의 마음,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란 상대방도 의식하지 못한 그의 모든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다. 예컨대, 외모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가진 나머지 훌륭한 가치들을 돌보지 않기 쉽고, 당연히 그것들은 무관심에 방치된 채 시들고, 마침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진여의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쓸데없는 갈등과 대립도 피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편견을 가지고 어떤 것들을 미리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일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편견 같은 집착을 버려야 그 사람의 정체가 제대로 들어오게 된다.
 
나나 타인이나 모두 단순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우주에 가까운 수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집착에서 벗어날 수있다. 그 수많은 특징들은 수많은 인연들과의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 즉 연기(緣起)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특징으로 하나의 사물을 보는 것이 집착의 마음, 즉 생멸의 마음이라면, 하나의 사물을 마치 완전한 하나의 우주인 것처럼 보는 것이 진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종의 대표자 법장 스님이 <<화엄의해백문>>이란 책에서 “하나의 조그마한 티끌만 보아도 전체가 갑자기 나타나며, 이것과 저것은 서로 받아들이니 가느다란 머리카락 하나만 보아도 모든 사물이 함께 나타난다.”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철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계를 이해라고 관리하기 위해 만든 고효율 장치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하지 않으면 도전하지 않는다. 그냥 도전보다는 누구 누구처럼 살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남이 정해준 정답을 찾으려는 것에만 집착한다. 이런 사람은 야성(野性)이 부족하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타인의 이론에 노예가 되어 지켜야 할 것을 많이 만들고, 선악의 기준을 중요시한다. 그럼 철학을 한다는 것은 야성을 키우는 일이다. 마음 속의 야수를 키우는 것이다. 도전하고 집착하지 않는 거다. 짐승처럼 덤비는 일이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여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김승희  (0) 2023.07.02
비/천양희  (0) 2023.07.02
7월/목필균  (0) 2023.07.01
7월에게/고은영  (0) 2023.07.01
죽편(竹編)1-여행/서정춘  (0) 2023.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