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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바람이 되고 싶다/김명관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29일)

아침에 일어나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찾는다. 물론 몇 시인가 알아보는 마음이지만, 바로 페이스북을 연다. 나에게 페이스북은 세상과 만나는 광장이다. 다른 이들의 일상을 엿보지는 않는다. 또 광고에 엮이지 않으려고 거의 대부분을 패싱한다. 그러다 가끔씩 만나는 찬물 같은 문장들이 나를 깨운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이다.

"살아보니 알겠다.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진다. (…) 넘치면 넘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감사하게 사는 것이다. 삶을 억지로 살려고 하지마라. 삶에게 너를 맡겨라.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러니 주어진 자신의 길을 묵묵히 때론 열정적으로 그렇게 그렇게 가는 것이다."

카카오톡도 사람을 만나는 장소이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는 단체 카톡방이 10개이다. 거의 대부분은 그냥 패싱이다. 여기도 가끔 나를 붙잡는 문장들이 있다. "이제 흐르는 강물에 삶을 맡겨라." 내가 존경하는 강명수 사장이 보낸 메시지이다. 어제 저녁에 만난 이야기 하나 더 한다. "사치(奢侈)보다 가치(價値)에 초점을 맞추자." 노자 <<도덕경>> 제29장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是以聖人(시이성인) 去甚 去奢 去泰(거심 거사 거태)" 이 말은 '따라서 성인은 지나친 것과 사치, 교만하지 않는다"는 거다. 여기서 "거(去)"는 버리거나 피하는 거다. "심(甚)"은 지나치고 극심한 것이고, "치(奢)"는 사치하는 거고, "태(泰)"는 과분한 또는 교만한 또는 태만한 거다.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과도한 것을 버리고, 과욕을 버리고, 교만을 버린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지나친 것을 피하고, 꾸미는 것을 버리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나는 '이로써 성인은 지나치지 않고 사치스럽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로 풀이하고 싶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필요를 욕구와 욕망으로 구분했다. 예컨대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으려는 것은 욕구이지만, 즐기기 위해 음식을 먹으려는 것은 욕망이다. 더위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입으려는 것은 욕구이지만, 사치하기 위해 화려한 옷을 찾는 것은 욕망이다. 이러한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서 노력하면 어떻게든지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정신적 요구로서 어떻게 해도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 욕구는 채우되 욕망을 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욕망은 영어로 desire(프랑스어로는 envie)이고, 욕구는 need 혹은 want(프랑스어로 besoin)이다. 욕구는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결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라면, 욕망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결핍을 채워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과정이다. 욕구는 생존과 같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욕망은 행복 추구와 같이 '있으면 좋은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욕구는 뭔가 결핍이 생긴 상태를 의미하고, 욕망은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갈구하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구별하기 힘들다면, 욕구는 무의식적으로 결핍된 상태를 채워서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이고, 욕망은 자기 스스로, 즉 의식적으로 부족을 느껴서 탐하는 것이므로 욕구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참고로 탐욕은 욕망을 뛰어 넘어 남들이 보기에도 과도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 단계가 되면, 남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사치보다 가치에 힘을 주고, 흐르는 강물에 삶을 맡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여기까지 왔다. 그래 피해야 할 것이 허영(虛榮)이다. 일반적으로 허영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과 지위, 돈 그리고 학위 따위에 목을 맨다.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깨달음을 수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허영을 버리는 ‘마음 근육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은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러니까 ‘원래 맨얼굴’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페르소나(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 연극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사용하던 가면)를 벗고 맨얼굴을 직시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으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말을 한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며, 자신의 불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신의 불성(佛性)’이란 어떤 페르소나(가면)도 착용하지 않은 마음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본래면목(맨얼굴)이란 자신의 불성, 아니 자신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것이 위의 가르침에서 직지(直指)나 견(見)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나 자신의 불성을 가리고 있는 두터운 페르소나를 제거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허영을 버리고, 흐르는 강물에 삶을 맡기는 하루를 살고 싶다. 오늘 아침 시처럼, "바람이 되고 싶다." 아침 사진도 주말 농장의 바람개비이다. 바람이 되어 계속 돌리고 싶어 찍었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지/인생을 등에 지면 짐이 되고/가슴으로 안으면 사랑이 되는 거야" (신광철 시 <느릅실 할머니와 홍시> 일부). 사실 오늘 노자 <<도덕경>> 제31장 읽기를 더 이어가려 했다. 그 내용은 시 다음으로 이어간다.

바람이 되고 싶다/김명관

바람 분다고 불평하지 마라
사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맞고 바람 들고 바람나고
인생이 온통 바람이니

바람맞고 애태우며 허탈했던 젊은 날도
때로는 오장육보에
바람 들어
실없는 사람이 되었던 숱한 세월도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겹겹이 껴입어도
바람이 드는데
대놓고 피울 수 없었던
늦바람의 낯선 은밀함도
바람 잘날 없던 한 때의 기억일 뿐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바람은 분다
고비 사막 너머
바이칼 호수 옆
타이가 산림지대의 자작나무 숲까지
휑하니 갈 수 있는
그런 바람이

도올 김용옥의 <<노자가 옳았다>>에서 제31장의 해설을 읽다가, "괘도(詭道)"란 말을 어제 알게 되었다. 사전적 정의는 '남을 속이는 수단'이다. 이 말은 손자가 말하는 병법(兵法)이다. "병(兵)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속임수의 도(詭道, 궤도)이다.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면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하고, 쓸모 있으면 쓸모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하고, 가까이 있으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고, 멀리 있으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고, 상대방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으면 꼬셔내야 하고, 상대방이 어지러워지면 가차없이 쳐들어가 취해야 한다."

사실 평화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평화는 전쟁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 위에 서있는 거다. '궤도'이든, '대도'이든, 도(道)와 병(兵)은 태일(太一=세월)의 양면이다. 도올 김용옥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궤도'란 노자의 대도(大道)의 논리를 그대로 두고 방편적으로 뒤집은 거라고 말한다.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쓴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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