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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농사법/한광구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옥수수의 입들은 자신의 버팀목이 되는 줄기에서 시작하여 시계침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타고 올라간다.

오늘 아침부터 이틀 동안 옥수수와 얽힌 사유를 전개해 볼 생각이다. 어제는 날씨도 덥고, 코로나-19로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요구하여 집에서 아무 일정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평소 미루어 두었던 <배철현의 매일 묵상>을 묶어서 읽었다. 거기서 만난 이야기이다. 마침 어제 아침에 예쁘게 올라온 옥수수의 수염을 만나기도 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오늘의 시는 한광구 시인의 <농사법>이다. 내 농사법이기도 하다. 내 딸은 내년에는 그만두라고 한다. 수확한 것들을 제 때 다 못 먹고 버리는 것이 아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제는 자색 감자를 캐어, 소 곱창 구이에 섞어 구워 먹었다. 한 사람 죽어 나가도 모를 정도로 맛있었다. 거기다 레드 와인을 곁들이면, 왜 우리는 와인이 음식 맛을 끌어 올리는지 알 수 있다. 딸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추억이다. 그 맛을 떠 올리면 세상에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

아! 옥수수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 옥수수를 자세히 관찰하면, 옥수수의 입들은 자신의 버팀목이 되는 줄기에서 시작하여 시계침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타고 올라간다. 배철현 선생의 글을 보고, 나는 옥수수를 다시 잘 살펴 보았다. 배교수에 의하면, 단테가 <연옥>이라는 산을 올라가는 방식도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상승하는 방식이라 한다. 그는 우리가 음료수 뚜껑을 여는 방식도 동일하다고 알려 주었다.

이런 잎의 방향을 우리는 '잎 차례' 또는 한문으로 '엽서(葉序)'라 한다. 식물은 저마다 '엽서'가 있다.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하여 유전적으로 결정된 삶의 방식이다. 잎이 상승하려면 밖으로 퍼져 나가는 원심력과 안으로 당기면서 상승하려는 구심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햇빛과 비가 하늘에서 내려 식물의 잎에 떨어진다. 위에 있는 잎들은 아래에서 차고 올라오는 잎들도 충분히 햇빛과 비를 맞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엽서'를 잘 보면, 새로운 잎이 이전 잎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돌아서는 신비를 보인다. 나무들도 마찬가지이다. 햇빛을 맞는 위의 나뭇잎이 아랫잎들을 배려한다. 배철현 선생에 의하면, 엽서의 문법은 점진(漸進)이다. 이어지는 사유는 시 다음으로 미룬다.

농사법/한광구

잘못 앉은 돌은 골라내고 굳어진 흙을 바수어 잡풀은 뽑아내고 하늘이 주신 말씀을 받아 이 땅에 엎드려 사는 목숨의 숨결과 섞었습니다. 보세요. 말씀이 파릇파릇 싹이 돋고 꽃 피고 열매를 맺는, 보십시오. 별이 지고 난 하늘에도 꽃이 피고, 길이 나고, 땅에서 하늘나라 저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말이 복음처럼 파란 잔디밭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이게 제 필생의 농사법입니다.

우리가 점진(漸進)하려면, 즉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면, 세 가지 원칙이 만들어 낸 역동적인 힘이 필요하다.

하나는 집중이다. 점진의 기반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기반이 되어 나감과 들어감을 강렬하고 단호하게 단속한다. 집중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이며, 그 상황으로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움츠림이다. 집중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집중이나 몰입에 안주하고 아무런 행위를 보여주지 않는 생물은 이미 죽은 것이다. 집중을 수련하는 사람은 실생활에서 자신의 언행을 통해 그 실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 글을 써가며 내가 이해한 내용을 다시 잘 써 보는 것이다. 그냥 읽기만 했을 때와, 글로 다시 잘 써볼 때와 어떤 글을 읽을 때 그 이해도가 크게 다르다. 그러면서 내 생각도 나온다.

점진의 원칙 두 번째는 의지(意志)이다. 의지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자생적인 능력이다. 배철현 선생은 옥수수로 예를 든다. 옥수수는, 수백만 년동안 그랬던 것처럼, 열매 옥수수를 시간이 되면 맺을 것이다. 생명의 약동과 의지는, 동식물을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에너지이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의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간절히 원했던 일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옥수수 잎의 의지는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가려는 원심력이다. 그 힘이 없다면, 잎들은 중력에 못 이겨 쳐져 죽고 말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타성과 관습에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점진의 세 번째 원칙은 상승이다. 상승은 지구의 원칙인 중력에 대한 거역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중력을 거슬러 자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죽은 식물을 바로 중력에 복종하고 고개를 내린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상승에 대한 시도로  맺을 열매가 옥수수이다. 알알이 익은 옥수수는 생명에 대한 하나의 노래이다. 이젠 옥수를 먹을 때마다 그 노래를 들어 보리라. 식물이든 인간이든 그러니까 각자의 하루는 점진하기 위해 수련하는 시간일 뿐이다. 나의 하루도 마찬가지이다.

'화서(花序)'란 말도 있다.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으로 '꽃 차례'라고 한다. 이성복 시인의 시 창작집 중 『무한 화서』란 것이 있다.  화서, 아니 '꽃 차례'는 두 가지이다. '무한 화서'와 '유한 화서'. 후자는 성장이 제한 되며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꽃이 핀다. 전자는 성장이 제한 없이 아래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꽃이 핀다. 유한 화서는 원심성, 무한화서는 구심성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이 무한 화서는 밖에서 속으로 꽃을 피우면서 제한 없이 밑에서 위로 성장하며 무한으로 나아간다. 인간도 검소하며, 늘 내면을 성찰하는 사람이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은 원심력의 속성이 있다. 반면 인간의 본성은 구심력(중력)의 속성이 있다. 욕망은 점점 더 커지고 높아지려 하기 때문이다. 원심력을 타고 자신의 본성을 이탈하려는 욕망을 중심 쪽으로 끌어내리려고 절제하는 태도가 검소함이다. 절제, 검소로 욕망을 제어해야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식물들의 화서, 꽃차례가 알려준다. 그러니까  식물들의 잎이든, 꽃이든 점진적으로 상승하려면 내면으로 들어가 몰입하고 집중하는 구심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사유를 좀 더 끌고 간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 세계를 구축한다. 개념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권위를 갖기 쉽다. 게다가 개념은 그 권위를 타고 무한 상승하여 윗자리를 차지한다. 이 상승을 부추키는 힘을 우리는 원심력이라 한다. 그래서 지식은 무한 분화한다. '나'의 고유성은 나의 몸에 있고, '나'의 마음에 있다. 개념이나 지식은 외부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원심력 같은 것이다. 반면 '나'의 몸과 마음은 중력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욕망도 원심력이라면, 그 욕망의 절제는 구심력이다. 이렇게 분리되는 현상을 좁히는 일이 나를 고독하게 만날 때 이루어진다.

이 분리 현상이 커진다는 것은 내 몸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과 나의 머리가 생각하는 일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중력이 빠지면, 헛도는 '나'가 없는 행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 마음이 지켜지지 않는 독서와 내 몸이 지켜지지 않는 읽기,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작동하지 않는 지식은 항상 나를 배반한다. 자발성(自發性)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의 재미를 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을 진정으로 즐길 수 없다. 즐거움이란 내 마음이 공감을 경험한 후에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의 공간 안에서 일으키는 진동이다. 독서를 통해서 지향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즐거움을 거쳐서 자기가 재발견되고, 재발견된 자기가 다시 쓰기로 확장 될 때,  즐거움은 배가 된다. 그러면서 자기는 더 확장된다. 자기 스스로 운동, 즉 움직임을 화복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게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다. 너무 멀리 왔나? 어쨌든 그래 아침마다 나는 글을 쓴다. 그리고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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