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람들은 아직도 공자 이야기를 한다고, 흉본다.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라 자신의 본성(本性)을 잊고, 호리피해(好利避害-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손해가 나는 것을 싫어한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4대성인(四大聖人)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해 보는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아니라고 본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세상은 언제나 "정면"으로 서 있고 다가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갯벌, 힘 없는 모래그늘"처럼 '겸손(謙遜)'이다. 그래 공자는 다음의 네 가지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다.
-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 함부로 단언하지 않았으며,
- 자기 고집만 부리지 않았고,
- 아집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자절사(自絶四): 무의(毋意), 무필(毋필), 무고(毋固), 무아(毋我)."(공자) 나는 최근에 인간관계가 힘들면, 마음 속으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란 뜻의 "I'm nothing"을 속으로 외친다. 철학을 공부한 한 부장검사는 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영어로 I(나)"는 주관적인 것으로 규정해야 할 어떤 대상이 아니기에 원래 없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동의한다. 여기서 '겸손'이 시작된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를 공자는 "자절사(子絶四)"로 표현했다. 여기서 "절사"란 "네 가지를 끊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절사"란 다음의 네 가지를 절대 하지 말란 이야기이다. 공자가 오랜 경험과 통찰을 통해 절대 하지 말라고 강조했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게/권대웅
바다는 언제나 정면인 것이어서
이름 모를 해안하고도 작은 갯벌
비껴서 사는 것들의 슬픔을 나는 알고 있지
언제나 바다는 정면으로 오는 것이어서
작은 갯벌하고도
힘없는 모래 그늘
#인문운동가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시하나 #권대웅 #와인비스트로뱅샾62
좀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1) 무의(毋意)
우리는 쉽게 판단하며, 함부로 억측한다. 일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상식과 편견은 깻잎 한 장 차이이다. 모든 일을 조사하고 분석하며 진행할 수는 없지만, 본인의 직감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어떤 것을 판단하기 전에 그것이 팩트(사실)과 다름이 없는지, 지나치게 편견에 의존한 판단은 아닌지 자신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애매한 것은 귀찮더라도 한 번 조사해 보고 판단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예수도 마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 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판단은 습관이다. 교만에서 나오는 습관이다. 판단 안에는 '나라면 더 잘하겠다"라는 교만이 들어간다. 그 교만은 나도 용서받은 사람임을 깨닫는 순간 사라진다.
(2) 무필(毋必)
함부로 단언하지 않으려면, 자신만 옳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일이다. 좋고, 나쁜지 누가 아는가? 세상에 100% 한쪽만 진리인 것은 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조건부이고 상대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자기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걸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믿고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늘 진리와 믿음은 다르다는 명제를 기억해야 한다. 특별히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면, 주변 사람들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다름'으로 풀어 나가야 하지, '옳고 그름'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 유연하게 생각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대처하는 게 좋다. 삶의 지혜이다.
(3) 무고(毋固)
자기 고집만 끝까지 부리지 않는 일이다. 살다 보면 자기 주관을 관철해야 하는 순간이 분명 있다. 특히 결단력이 중요한 리더의 위치라면 더 그렇다. 그건 순간에 책임감을 바탕으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까지 굴어야 할 일은 별로 없다.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자기 뜻대로 해야 하는 사람은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치기 쉽다. 웬만한 것은 적당히 넘어가고 중요한 것만 취할 줄 아는 요령이 중요하다.
(4) 무아(毋我)
아집(我執)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너무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우리 사회는 전면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관대하지 않다. 그러니 나설 때는 가식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하더라도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는 공간적 의미, 영원불멸의 존재로서의 '실체(實體, 또는 본체 本體)라 불릴 수 있는 '아(我, 아트만, 사물의 본질)'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고정불변(固定不變)의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일체의 모든 것은 4대(지/수/화/풍)의 4 요소가 인연에 의해 모이고, 또 흩어지며 변하는 것이며, 색/수/상/행/식의 오온 역시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연이 다하면 흩어져 버린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아의 실체'라고 착각하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각자 세계를 보는 나름대로의 시각, 즉 이론과 지적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와 관계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지적체계, 가치관이나 신념들은 사실 생산되자 마자 부패가 시작된다. 이념이나 지식은 '사건의 똥'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가치의 결탁물이다. 그러한 자기를 장자는 '아(我)'라고 한다. 이 가치의 결탁을 끊고, 즉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나는 자기를 '오(吾)'라고 했다. 자기 살해를 거친 다음에 참된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했다. 흔히 우리는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자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그런 상태를 우리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고 한다. 이 무아를 '진아' 또는 '참나'라고도 한다. 이것을 요즈음 말로 하면, '반성', '각성'이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선정', '깨달음'이라 말한다. 서양철학적으로 말하면, '독립적 주체'라고 한다. "오상아", 장자의 '자기 살해'는 기존의 가치관에 결탁되어 있는 나를 죽임으로써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충만해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허심(虛心, 빈 마음)'의 상태를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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