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6월 25일)
나는 지난 주말부터, <<바다로부터 얻은 작은 철학(petite philosophie de la mer)-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모든 삶은 흐른다'>>(로랑스 드빌레르)를 흥미롭게 읽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전하는 말'이다. 이 책은 우리가 무엇이든 철학[사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철학은 생각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문명은 생각의 결과라는 점에서 지적 산물이다. 따라서 지적 전통이 있는 민족이나 나라들만 발전할 수 있다. 의식은 본능적이기도 하지만, 생각은 의도를 따라 통제된 의식으로서 일부러 하는 것이며 매우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이며 의도적이고 또 일부러 하는 활동 능력을 ‘지적(知的)’이라고 한다. 단순히 지식과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보다는 훨씬 넓은 범위에서 사용한다.
최진석 교수는 "‘지적’이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은 그런 거부감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그저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면서, 다음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지구는 둥근가? 아니면 평평한가? 별생각 없이 감각과 본능대로 얼른 보면 지구는 평평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구는 둥글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하나의 검증된 믿음으로 서의 지식이다(justified true belief). 지구를 평평한 것이라고 ‘감각’하는 사람들보다는 지구를 둥글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삶의 질과 양을 더 크게 가져가는 것은 이치상 매우 당연하다. 지적이지 않으면, 지구를 평평하다 여기고, 지적이면 지구를 둥근 것으로 인식한다.
‘지적’인 사람은 지적이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무엇이든지 인위적으로, 일부러 할 줄 안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지적 인내’라고 말한 데에서 우리는 ‘지적’이라는 개념의 쓰임새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력, 절제, 사랑, 자비, 배려, 대화, 타협 등등도 감각과 본능을 이겨낸 지적 행위들이다. 대화를 잘 못 하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고, 정해진 생각에 갇히고, 게으르고, 예의나 염치가 없고, ‘내로남불’에 빠지는 것은 다 지적이지 않아서 이다. 이런 지적인 태도는 생각하는 기술에서 나온다. 즉 철학을 할 줄 아는 거다.
철학이라는 말을 한국어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말의 프랑스어는 '필로소피(philosphie)'이다 필로(philo)가 '사랑하다'라는 뜻이고, 소피(sophie)가 지혜이다. 그러니까 '필로소피'란 '지혜를 사랑하다'라는 말이다. 지혜는 깨달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혜는 무지를 없애는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진짜 황당하게 당하는 일은 모르고 하는 짓이다. 물론 알고 하는 나쁜 짓은 수치심을 느끼는데, 모르고 하는 나쁜 짓은 정말 답이 없다.
철학은 '사랑해서 아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혜와 자비, 깨달음과 사랑은 불교 철학의 핵심이다. 다른 이가 곧 나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사랑해서 아는 것'이다. 나는 "사랑의 지혜"라는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혜는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로 지금은 잘 이해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사랑하는 지 알아야 그를 제대로 아는 것이기도 하다. 유홍준의 말이 생각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어쨌든 철학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서 송골매같은 새의 눈으로 그 곳을 나를 위한 천국으로 만들려는 행위이다. 이를 어려운 말로는 '사유(思惟)'라고 한다. 왜 사유가 필요한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결론적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여, 그걸 일상의 삶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울퉁불퉁한 것을 보편으로 승화하는 일이지, 다른 데서 생산된 창백한 보편을 가져와 그것으로 자신의 울퉁불퉁함을 재단하는 일이 아니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기성의 철학 이론으로 삶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철학적으로 살려고 도전하는 것이다. 정해진 철학을 이념화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평가하기 보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철학을 하는 것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남이 정해준 정답을 찾아 얌전히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발견해서 해결하려는 야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쉽게 신념이나 이념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매혹적인 세련되고 정밀한 이론에 충실한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거칠고 정리 안 된 미숙한 자신의 현실을 깎고 다듬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의 정리가 마음에 든다. 철학을 하는 자가 "탁월한 사유 시선"을 갖고, 일상을 문제적으로 살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철학은 자연의 운행 원리를 근본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자연을 태극, 음양, 오행, 이, 기 등의 범주로 해석하고 설명하였다. 일부러 하고, 인위적으로 한 일이다. 다름 아닌 지적인 태도다. 조선 시대에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지적인 삶을 살았다.
철학이 추상적인 개념들을 다루기 때문에 현실과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철학은 울퉁불퉁하고 구체적인 현실에서 태어난다. 다만, 그것을 수입한 사람들은 울퉁불퉁한 구체성을 제거한 평평하고 추상적인 이론의 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철학과 현실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주자학이 우리에게 탁상공론의 요소가 많았던 것은 주자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자학을 수입해서 숭배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스스로의 노력을 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쉽게 수입해서 쓰는 나라들은 비록 지적인 전통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단계에서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이 한계 앞에 서 있다. 지적인 태도가 있어서 여기까지는 왔지만, 수입한 이데올로기로 단련한 지적 태도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지적인 태도가 생각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을 놓고 말한다면, 우리는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여 살았지 스스로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명이 생각의 결과이고, 지적 산물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현재를 억지로라도 일부러 자세히 생각하고 들여다볼 일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에 들어서고 싶은 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오래된 자신의 정해진 생각을 맹목적으로 지키려는 태도를 지적 활동으로 믿거나, 홍위병처럼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정의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 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생각 없이 지적이기는 불가능하고, 지적이지 않으면서 일류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최진석 KAIST 김재철AI대학원 초빙석학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의 주장이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합리적 사유를 하는 지적인 태도와 그 문화를 일구는 일이 아주 시급한 상황이다. 그런 차에 흥미로운 책을 지난 주말에 읽었다. 그게 <<바다로부터 얻은 작은 철학(petite philosophie de la mer)-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모든 삶은 흐른다'>>(로랑스 드빌레르)이다. 이 책은 우리가 무엇이든 철학[사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철학은 생각하는 기술이다. 이 말을 하려 다가 옆 길로 많아 나아갔다.
오늘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보면서, 우리는 삶에서도 올라가면 내려갈 때도 있는 법이라는 사유를 함께 따라가 본다. 바다에는 낮과 밤에 각각 두 번의 밀물과 썰물이 있다. 이건 원래 그렇게 타고나서 자기 혼자 물러나고 밀려오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러나고 밀려오려면 모든 조건이 다 갖춰져야 한다. 바다는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자신만의 시간과 리듬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와는 다른 리듬으로 살아간다. 한 번 삐긋하면 쉽게 돌이킬 수 없는 리듬이다. 그러나 파도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파도가 전하는 진실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새롭게 도약하는 힘, 회복할 에너지를 찾을 수 있다는 진실이다.
파도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상실과 풍요, 회의와 확신이 나름의 속도로 온다. 살다 보면 받기도 하고 거부도 당하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가끔은 회복되기도 한다. 삶이란 항상 불안하고, 고난과 역경을 피하지 못하면 괴롭다. 하지만 산다는 건 그런 거다. 풍요로운 시기와 궁핍한 시기가 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극복하면 될까?
저자 로랑스 르 빌레르는 파도처럼 살라고 한다. 파도는 물러나고 밀려오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파도처럼 살고자 한다면, 우리 삶에 다가오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는 거다. 그저 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다. 바다는 파도가 오지 않도록 억지로 막거나, 무리하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냥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인생에도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다. 그러니 그 움직임을 거스르기보다는 곁에서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낫다는 거다. 삶은 파도처럼 일어난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번 달을 청구서 없이 보낸다면, 다음 달을 대비해 저축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번에 밀려올 파도에 쓸릴 때, '파도가 올 줄 알았어. 곧 지나가겠지'라며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에 의하면, 바다는 우리에게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는 일을 멈추고 자신의 숨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는 거다. 물결의 흐름으로 표현되는 바다의 숨소리는 마치 바다의 시계처럼 보인다는 거다. 그저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알리는 바다의 시계 말이다. 그것으로 바다는 우리에게 영원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는 거다. 그러니 고난과 역경이 와도 지치지 말고 계속 너울거리는 물결에 몸을 맡기라는 조언을 들으라고 한다.
또한 바다는 가슴을 채우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편안한 호흡과 같다는 거다. 그 호흡을 가만히 따라 가면 갑자기 몸이 수평으로 길게 뻗어 붕 뜬 것 같았다가 곧 수직으로 봉긋하게 솟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마치 교회의 높은 천장, 소프라노의 아리아, 서프라이즈 감동으로 느끼는 기분처럼 말이다. 동시에 우리의 근심과 욕심도 점점 아래로 내려와 땅에 닿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거다. 멋진 표현이다. 이런 감정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배웠다. 어쨌든 바다는 우리에게 자신의 호흡으로 우리들에게 너 높게, 더 넓게 보라고 이야기 한다는 거다. 이런 식으로 바다를 보고, 섬세한 감정을 기르라는 거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한 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1의 계율이고, 한 번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제 2의 계율이다." (에리히 케스트너, <<두 가지 계율>>) <<백살까지 유쾌하게 나이드는 법>>을 쓰신 이근후 교수의 글에서 만난 문장이다. 한 번만 살아야 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아침 화두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사유를 이근후 교수는 인용했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다 하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 되고 극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문장 속에 답이 있다고 본다. 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가운데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나이 들어 감에 겪는 슬픔을 달래 준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 유쾌하게 살아야 한다. 사소한 기쁨과 웃음을 잃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바다 일기/이해인
늘 푸르게 살라 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위를 바라보며
내 약한 마음을 든든하게
그리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마음
갈매기처럼 춤추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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