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여름에는 풀이 나는 게 아니라/풀이 쳐들어 온다/빈 공간을 사정없이 침투하고/무참하게 진군해 온다//자연에는 진공 상태가 없다. 사회에는 백지 상태가 없다/권력에는 순수 상태가 없다."(박노해) 내 주말 농장도 풀이 점령을 했다.그냥 두기로 했다. 뽑으려 하니, 모두 잡초로만 보이더니, 품으려 하니, 모두 꽃으로 보이 더라는 말이 있다. 그래도 농장 가는 길에 옥수수는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처럼, 옥수수는 암술과 수술이 서로 다른 꽃 봉오리에 있어, 우리는 옥수수의 암꽃과 수꽃을 잘 구별할 수 있다. 옥수수는 소위 '자웅이가(雌雄異家)'이다. 한 나무에서 두 개의 집안이 '딴 집' 살림을 한다. 수 이삭은 줄기의 끝에 달려 있다. 우리가 여름철에 삶아 먹는 암 이삭은 줄기의 중간 마디에 껍질에 쌓여 두세개가 달려 있다. 암술대의 수염은 껍질 밖으로 나가 꽃가루를 받는다. 우리는 그걸 옥수수 수염이라고 해서 따로 말려 옥수수 수염차를 만들어 마신다.
옥수수는 봄에 옥수수 씨앗을 심거나 모종을 사다 심는다. 여름철이 되면 내 키보다 더 큰다. "옥수수의 꼭대기에 있는 수술을 외부에 보이기 위한 왕관이고, 껍질로 켜켜이 싼 암술은 자신의 가슴이 간직한 보불이다."(배철현) 옥수수를 잘 들여 다 보자. 만약 옥수수가 맨 꼭대기 수술 위에서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옥수수는 다 자라나지 못하고 그 힘에 못 이겨 땅으로 쓰러질 것이다. 옥수수의 심장에서 만들어지는 '보물'은 아직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껍질 밖으로 소위 수염만 엉성하게 분산한다. 조선 양반의 수염처럼. 흥미롭다.
그리고 옥수수를 잘 관찰하면, 옥수수의 입들은 자신의 버팀목이 되는 줄기에서 시작하여 시계침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타고 올라간다. 이런 잎의 방향을 우리는 '잎 차례' 또는 한문으로 '엽서(葉序)'라 한다. 식물은 저마다 '엽서'가 있다.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하여 유전적으로 결정된 삶의 방식이다. 잎이 상승하려면 밖으로 퍼져 나가는 원심력과 안으로 당기면서 상승하려는 구심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햇빛과 비가 하늘에서 내려 식물의 잎에 떨어진다. 위에 있는 잎들은 아래에서 차고 올라오는 잎들도 충분히 햇빛과 비를 맞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엽서'를 잘 보면, 새로운 잎이 이전 잎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돌아서는 신비를 보인다. 나무들도 마찬가지이다. 햇빛을 맞는 위의 나뭇잎이 아랫 잎들을 배려한다. 이런 엽서의 문법은 점진(漸進)이다. 우리가 점진(漸進)하려면, 즉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면, 세 가지 원칙이 만들어 낸 역동적인 힘이 필요하다.
하나는 집중이다. 점진의 기반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기반이 되어 나감과 들어감을 강렬하고 단호하게 단속한다. 집중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이며, 그 상황으로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움츠림이다. 집중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집중이나 몰입에 안주하고 아무런 행위를 보여주지 않는 생물은 이미 죽은 것이다. 집중을 수련하는 사람은 실생활에서 자신의 언행을 통해 그 실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 글을 써가며 내가 이해한 내용을 다시 잘 써 보는 것이다. 그냥 읽기만 했을 때와, 글로 다시 잘 써볼 때와 어떤 글을 읽을 때 그 이해도가 크게 다르다. 그러면서 내 생각도 나온다.
점진의 원칙 두 번째는 의지(意志)이다. 의지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자생적인 능력이다. 옥수수로 예를 든다. 옥수수는, 수백만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열매 옥수수를 시간이 되면 맺을 것이다. 생명의 약동과 의지는, 동식물을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에너지이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의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간절히 원했던 일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옥수수 잎의 의지는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가려는 원심력이다. 그 힘이 없다면, 잎들은 중력에 못 이겨 쳐져 죽고 말 것이다. 우리 인간도 타성과 관습에 묶이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점진의 세 번째 원칙은 상승이다. 상승은 지구의 원칙인 중력에 대한 거역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중력을 거슬러 자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죽은 식물을 바로 중력에 복종하고 고개를 내린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상승에 대한 시도로 맺을 열매가 옥수수이다. 알알이 익은 옥수수는 생명에 대한 하나의 노래이다. 이젠 옥수를 먹을 때마다 그 노래를 들어 보리라. 식물이든 인간이든 그러니까 각자의 하루는 점진하기 위해 수련하는 시간일 뿐이다. 나의 하루도 마찬가지이다. 옥수수의 잎처럼, 오늘 시의 고만례 할머니처럼, 배려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고만례 할머니와 놋양푼 아줌마/이창숙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고만례 할머니는
어느 여름 저녁
모깃불 피운 멍석에 앉아
밤하늘에 솜솜 박힌 별을 세며
옥수수를 먹고 있었대
그때,
머리에 커다란 짐을 인 아줌마가
사립문을 빼꼼 열고 들어오더래
저녁도 못 먹었다는 아줌마에게
있는 반찬에 남은 밥을 차려준 뒤
짐을 풀어 하나하나 살펴보던 할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놋양푼이
그렇게나 좋아 보였다지 뭐야
며칠 뒤 있을 할아버지 제사 때
떡과 나물과 전을 담으면 좋을 것 같았지
한 개에 삼백 원이라는 놋양푼을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문질러 보다
할머니는 은근하게 흥정을 했대
"세 개 살 테니 천 원에 주슈."
열무 비빔밥을 한입 가득 떠 넣던
놋양푼 아줌마는 눈을 깜빡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그렇게는 안 된다고 거절했대
하지만 할머니는 조르고 또 졸랐지
결국 아줌마는 하룻밤 자고 난 다음 날
천 원에 놋양푼 세 개를 주고 갔대
할머니는 그걸 들고 산길을 내려가
동네방네 자랑을 했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깔깔 웃었지만
이유를 모르는 할머니는
그냥 같이 웃어버렸대
그 뒤로 할머니는 아줌마가 오면
있는 반찬에 함께 저녁을 먹고
나란히 누워 오순도순 얘기를 했지
친자매처럼 가까워져서야
수줍게 고백을 했는데
고만례 할머니도 놋양푼 아줌마도
전혀 셈을 할 줄 몰랐다지 뭐야
"남편이 갑자기 죽어서
헐 수 없이 장사를 시작했슈."
"셈을 모르고서 어찌 장사를 하누."
할머니가 혀를 차며 걱정을 하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대
"괜찮어유. 사는 사람이 하잖유."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줌마는
깊은 산속 고만례 할머니 집을
성님 집처럼 자주 찾아왔대
어느 날
반듯이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고만례 할머니를 안고
눈물 흘리던 그날까지
나는 모짜르트가 했다는 말을 되새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내 감성에 충실할 뿐이다." 그렇지만 가슴에 새겨 둔 명심(銘心)은 히브리 성서 <잠언> 3장 3절이다. "친절과 진실이 너를 떠나지 않게 하라. 친절과 진실을 목에 묶고 너의 심장의 서판에 새겨라".
친절은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라 한다. 역지사지 하는 마음에서 출발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나의 희로애락으로 공감하고 타인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실제로 애쓰는 행동이며, 타인의 정서를 진실로 기뻐하는 마음이다. 가장 대표적인 친절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진실은 히브리어로 에메스(emeth)이다. '에메스'는 '아멘'의 여성 명사형이다. 그리스도 인들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통해 기도를 끝맺는다. '아멘'은 '믿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은 일회성 행위가 아니라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려는 삶의 태도이다. 진실이란 그런 믿음이다. 진실이란 자기 신뢰이며, 그 가치를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이다.
나는 나를 믿고 나 스스로에게 친절하고 진실된 믿음을 가슴에 새길 것이다. 그래야 다른 이에게도 친절랗 수 있다. 다시 한번 구체적인 일상에서 실천할 다음의 내용을 소환한다. "누가 지혜로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누가 강한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사람이다. 누구 부자인가? 자신의 몫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누가 존경받을 만한가? 자신의 동료들을 존걍하는 사람이다." (<탈무드, "선조들의 어록" 4장 1절)
가슴에 새긴 이 4가지를 최근에 잊고 살았다. 그래 나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 생각이 흩트려지었다. 다시 정돈하고, 스스로에게 친절하고자 다짐하는 일요일 오전이다. 생명은 점진(漸進)이다. 조금씩 앞으로 나감이다. 그러려면,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원칙을 잘 지키는 일이다. 이것이 기본이다. 집중, 의지 그리고 상승이다. 집중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이며, 그 상황으로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움츠림이다. 의지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 의지가 있어야, 우리는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일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승이다. 점진적으로 시선을 높이는 일이다. 우리 각자의 하루는 상승을 위해 점진적으로 수련하는 시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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