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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모든 것을 아낄 줄 알면 모든 것이 일찍 회복되는 것이다.

239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6월 24일)
매주 금요일 오전에는 도반들과 노자 <<도덕경>>을 원문으로 함께 읽는다. 어제는 제59장을 읽었다. 그 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治人事天莫若嗇(치인사천막약색) :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끼는 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
夫唯嗇(부유색) 是以早服(시이조복): 오직 절제하는 것, 이것을 조복이라 한다.
 
오늘 아침은 "조복"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 본다. 노자의 생각은 '아낌'이 있을 때만이 "조복"한다는 거다. 그럼 우선 '아낌(嗇, 색)'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색(嗇)"이란 우리말에 "인색(吝嗇, 재물 따위를 지나치게 아낌)"이라는 말로 잘 쓰 듯이, 본시 "애색(愛嗇)", 즉 '아낌'의 뜻이라는 거다. 도올에 의하면, 동양 고전에서 애(愛)는 사랑의 뜻이 아니라, 아낌의 뜻이라는 거다. 농작물을 거두어들인 창고도 '아낌'이다. 보통 "색부(嗇夫)"라 하면 "농부"를 가리킨다는 거다. 자연의 순환,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삶을 사는 농부 야말로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아낌으로 미래를 대비하고, 어낌으로써 과거의 성과를 보존하고, 아낌으로 현재의 삶을 순환시킨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들에 속고 있다. 소비는 미덕이다. 아낌은 모든 것을 위축시킨다. 소비하라, 낭비하라 그래야 경제가 돈다. 산업혁명이래, 과학과 산업계가 상보적으로 결합한 이래, 서구 권 이외의 모든 자연세계가 자본주의의 먹이감이 된 이래, 대량사회의 대중교육과 과학이 결합하고, 그것이 또다시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20세기는 "소비의 경제", "낭비의 미덕"에 세뇌되고, 그것이 체화 되어 있다. 이 흐름에 강력한 저항을 한 것이 마르크시즘이었다.
 
그러나 그 사상은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반동이었을 뿐, 그러한 불평등을 형성한 문명 그 자체에 대한 반문명적 사고를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프롤레타리아와 대중의 혁명을 통해 그 흐름을 막는 댐을 형성했을 뿐이다. 그러나 댐은 금이 가면 근방 터져버린다. 따라서 그 댐은 한 반세기를 버티다가 사라지고, 그 자본주의 횡포와 과학의 만능은 더 강력한 격류(激流)가 되어 천지를 휩쓸고 있다. 그러다가 코로나-19의 출현은 하나의 반격이었던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코로나-19의 출현은 "마르크시즘이 세운 로칼한 댐과는 전혀 다른 무형 무명(無形 無名)의 도의 출현"으로 해석했다. 코로나-19는 "전 지구를 휘덮는, 아니 인간 생명 전체의 내면에까지 파고드는 정신혁명"이라는 거였다. 이 코로나-19의 "공포는 억압이나 강제의 공포가 아니요, 상생과 협동과 절제를 촉구하는 아름다운 우환으로 우리를 휘몰아쳤다"는 거다.
 
그러면서 도올은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 주문을 했다. 나열해 본다.
  • 미래학자라고 자처하는 지식인들의 망언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오직 오늘을 생각하라! 이 오늘 속에 과거가 들어있고, 미래가 들어있다. 미래에 대한 망상으로 오늘의 현실을 조작지 말라! 그래서 존 레논도 "Let it be"를 말했고, "living for today"를 말하지 않았는가?
  • 과거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 과학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라! 과학은 선(善)이 아닌, 불선(不善)일 수도 있고, 인류의 미래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개악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학은 나쁜 것이라는 카운터 과학적인 사유(counter-scientific thinking)도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서 도올은 가장 중요한 학교 문법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반문명적 사유를 현대인의 근원적 가치로 체화 시키는 것"이라 강조했다. "자본주의 횡포를 인류 문명이 체크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류 그 자체가 공멸해갈 것"이라는 거다. "우주는 더 이상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허(虛)가 없는 것이다. 사회도 자연도 자정(自淨)의 허가 상실된 것"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노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치인사천(治人事天), 막약색(莫若嗇)"은, 결국 문명의 크기를 줄이고, "인위(人爲)"의 폭을 "무위(無爲)" 속에 가두라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조복"을 도올은 "빨리 회복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여기 "복(服)"이 "복(復)이라고 보는 거다. 그래 도올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대저 오로지 모든 것을 아낄 줄 알면 모든 것이 일찍 회복되는 것이다." <<주역>>의 "복기견천지지심호(復其見天地之心乎, 천지가 부활하는 것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의 "복(復)"이라는 거다. 반복 순환이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거다. 코로나-19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것도 "색(嗇, 아낌)"을 통하여 "조복(일찍 회복됨)"에 도달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거다. "'아낌'이란 결국 '허(虛)의 확대이며, 이것은 결국 생명의 순환을 말하는 것이며, 생명의 순환이란 결국 조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도올은 보았다.
 
이런 차원에서, 아침에 읽은 백영옥 소설가의 좋은 글을 공유한다. 조복을 위해, 우리는 달리기 위해 멈추고, 채우기 위해 비워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그 '멈춤'을 자연 속의 나무에서 배운다. ‘해거리'라는 말이 있다. 과실이 한 해에 많이 열리면 그 다음 해에 결실량이 현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말하는데,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앵두 나무 등 모든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해거리'를 한다. "'해거리'는 정신없이 달리다가 천천히 한 해를 쉬는 ‘나무들의 안식년'인 셈이다."(백영옥) 하지만 과실을 수확해야 하는 농부 처지에선 수확량 감소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해거리'를 방지하고자 이들이 하는 일이 ‘가지 치기'이다. 썩은 가지는 물론이고 복잡한 잔가지와 큰 가지를 ‘미리’ 잘라 병충해를 막고 성장을 좋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지 치기'는 나무를 위해 인간이 해주는 ‘나무들의 디톡스'인 셈이다. 이 '디톡스'가, 노자가 말하는, "색(嗇, 아낌)"이 아닐까? 그래야 나무가 "조복"하는 것이 아닐까?
 
백영옥 소설가는 "‘해거리’와 ‘가지치기’는 ‘힘과 쉼’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양면의 지혜"라는 거다. 노자가 말하는 "색(아낌)"과 "조복(일찍 회복됨)"이라는 말과 겹쳐진다.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멈추고, 더 가득 채우기 위해 비우는 자연과 인간 모두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힘과 쉼"은 "얼핏 정반대 성질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힘을 빼고 천천히 멈춘 상태가 ‘쉼’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성장을 위해 힘을 내고, 달리고 나면 반드시 힘을 빼야 한다. 이것이 '해거리'를 하는 감나무와 '가지치기'를 하는 성실한 농부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다. '가지치기' 하는 농부의 마음은 지금 휑하게 잘린 텅 빈 가지에 있지 않다. 그들의 눈은 더 많은 열매가 달린 미래의 나무를 본다. 열심히 노동한 후, 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다시 코로나-19가 엔데믹 된 후, 세상이 다시 폭주(暴走, 매우 빠른 속도로 난폭하게 달림)하는 것 같다. 벌써 "색(아낌)"을 잊은 거다.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멈추고, 더 가득 채우기 위해 비우는 자연, 도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있는 거다. 다시 우리는 절제해야 한다. 노자의 가르침처럼. 그래야 우리는,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진정한 멋"에 이를 수 있다.
 
 
진정한 멋/박노해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사치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제대로 된 사치는 최고의 절약이고
최고의 자기 절제니까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멋을 간직해야 한다
비할 데 없는 고유한 그 무엇을 위해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내는 것
진정한 멋은 궁극의 자기 비움이고
인간 그 자신이 빛나는 것이니까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