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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간들은 일차적으로 땅 위에서 살아간다.

237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6월 5일)
오늘 아침은 나의 채소밭에 다녀왔다. 야채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야채는 꽃이 피지 않는 줄 안다. 모든 채소는 잎과 뿌리를 먹으니까 꽃은 아예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나물을 좋아한다. 나물이란 먹을 수 있는 풀, 나뭇잎, 뿌리, 채소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 또는 그것을 무친 반찬을 말한다. 이건 사전적 정의이고, 보통은 채소나 산나물, 들나물, 뿌리 등을 데친 다음 갖은 양념에 무쳐서 만든 반찬을 말한다. 우리 동네에는 신선한 나물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져다 먹을 수 있는 뷔페식 식당이 있다. 지난 겨울 퍽 자주 그 집을 다녔다.
 
이젠 양념하지 않은 야채(野菜)나 채소(菜蔬)를 즐긴다. 야채는 야생에서 자란 작물이고, 채소는 식용을 위해서 사람이 직접 키워서 수확한 작물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나만의 전략을 가지고 주말 농장을 운영한다. 첫 째 검은 비닐을 밭에 덮지 않는다. 그리고 밭에 불을 지른 후, 땅을 깊게 삽으로 파서 흙을 뒤집는다. 그리고 모종과 씨를 시간 차이를 주며 파종하거나 심는다. 그러면 나처럼 식구가 없는 사람은 그 수확량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다. 모종으로 심은 채소를 먹다 보면, 씨를 뿌린 채소가 자란다.
 
어젠 모종으로 심은 쌈채소들을 첫 수확했다. 물을 거의 주지 않고, 봄 햇볕을 맞고 자란 채소는 식감(食感)이 다르다. 식감이란 음식을 먹을 때 입안에서 느끼는 감각을 말한다. 영어로는 mouthfeel 또는 texture of food라 한다. 음료 분야에서는, 특히 와인에서는 바디(body)라 표현한다. 입 안에 꽉 찬 느낌을 주면, 풀 바디(full body)라 하고, 가볍게 느껴지면, 라이트 바디(light body)라 한다. 와인같은 음료에서 느껴지는 질감을 직물의 감촉처럼 생각하면 더 잘 느낄 수 있다. 러닝 셔츠도 100수가 있고, 60수가 있다. 그 수에 따라 직물의 '바디'가 다르다. '바디'를 말 그대로 '몸', 한문으로 '체(體)'라고 하면, 모든 음식이나 음료에, 아니 모든 물건에 '바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제 수확해 먹기 시작한 쌈 채소는 여러 종류이다. 로메인, 적상추, 치커리, 레이스 달린 겨자채, 적겨자채, 일본 상추 등 5 종류였다. 그것보다 저녁에 먹은 시금치 된장국이 더 좋았다. 옆 밭에서 얻은 시금치인데, 혹독한 겨울을 난 것이기에 풀바디로 그 식감이 대단했다.
 
정원과 텃밭은 다르다. 문화적으로 앞선 나라에는 정원 문화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나라에는 텃밭 문화 밖에 없다. 정원은 쓸모 있는 땅에 쓸모 없는 것을 심는 것이고, 텃밭은 쓸모 있는 땅에 쓸모 있는 것을 심는 거다. 그러나 내 밭은 정원 같은 텃밭이다. 과거에는 정원과 텃밭의 모종들이 별개였다. 정원엔 다양한 볼거리 위주의 꽃이었고, 텃밭에는 먹을 채소 종류를 심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꽃과 채소의 구분을 굳이 하지 않는다. 점점 텃밭의 비중을 넓히고 채소와 허브를 주로 심는다. 잎이 자라면 가을까지 잎을 따서 샐러드 요리를 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시간이 지나면 채소는 꽃이 피고 씨를 맺는다. 과거에는 꽃대가 올라오면 기를 쓰고 꽃대를 꺾었다. 잎을 오랫동안 먹어야 하기 때문에 꽃을 맺고 씨 만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이제는 잎을 뜯어 먹을 만큼 먹고 꽃이 맺히면 그때부터 꽃을 즐긴다. 채소 꽃들이 그렇게 예쁜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치커리의 파란 꽃은 오래도 갔지만 품위가 있다. 당근, 상추, 부추, 파, 루꼴라 등 모든 채소의 꽃이 정원용 꽃에 뒤지지 않는다. 각자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내 채소밭의 꽃 중의 으뜸 고수 꽃이다. 오늘 아침 사진이 그 거다.
 
위키백과 사전에 의하면, 고수 향채소는 '빈대풀'이라고도 한다. 미나리과에 딸린 한해살이풀로 동유럽 원산이라 한다. 베트남 쌀국수에 쓰이는 재료이다. 특유의 향과 맛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특유의 향이 있지만 고수는 소화 작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들은 일차적으로 땅 위에서 살아간다. 땅이 생성하는 것들을 먹고 산다. 땅은 "싣는다(載)'라는 표현을 잘 쓰지만, 그것은 온갖 생명을 생성해낸다는 뜻이다. <<장자>>의 "덕충부"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땅은 모든 것을 실어준다. "천무불복, 지무부재(天無不覆, 地無不載 하늘은 만물을 덮고 땅은 만물을 싣고 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을 알고 보면 다 땅에서 나온다. 땅이 변화한 것이다. 채소도 고기도 물도 모든 것이 땅의 변형태이다. 이것을 노자는 '인법지'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땅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완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땅은 반드시 하늘의 조건에 따라 생생(生生)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땅과 하늘의 협업체계가 생명의 기본 구조(structure)이다. 땅이 현실이라면, 하늘은 이상이다. 하늘의 조건에 따라 땅의 한정성이 구체화된다. 이것을 노자는 '지법천(地法天)'이라 표현했다. "인법지(人法地)" 그 자체가 "지법천(地法天)"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늘의 이상을 보통 "덮는다(覆)"라 표현한다.
 
<<주역>>에서 역(易)은 "낳고 낳는 것을 일러 말한다(生生之謂易)"이로 해석된다. 그러니 인간은 이 '생생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 일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를 "존재의 GPS"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하늘은 텅 비어 있지만 변화무쌍하다. 그럼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낳고 또 낳을' 수 있다. 그것을 일러 하늘의 무늬, '천문(天文)'이라 한다. 그 다음, 몸을 굽혀 땅의 이치를 살펴야 한다. 땅은 조밀하고 구체적이며 견고하다. 그래서 만물을 두루 포용할 수 있다. 그것을 일러 지리(地理)라고 한다. 천문과 지리, 그 사이에서 인사(人事)가 결정된다. 천문과 지문 그리고 인사의 삼중주가 한 인간 존재가 만들어 내는 삼중주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이 '인사(人事)'를 하는 행위를 우리는 문화(文化)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문명(文明)이다. '경작(耕作)'하지 않고 문화에서 나오는 문명을 기대할 수 없다. 문화라는 단어의 어원이 잘 말해준다. 배철현 교수는 최근 자신의 <묵상>글에 다음과 같이 문화를 잘 정의했다. "‘문화’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컬쳐(culture)는 ‘땅을 개간하다, 돌보다’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동사 ‘콜레레(colere)의 과거 분사형인 ‘쿨투라(cultura)에서 파생되었다. 그 의미는 ‘관리된 것, 개간된 것’이란 의미다. ‘문화적인 인간’이란 자신을 관리한 사람, 자신의 마음을 갈아엎은 자다. 그(녀)는 그곳에 새로운 종자의 씨를 심고, 그 씨가 발아하고 자라나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사람들이 그 나무가 자비롭게 주는 그늘에서 쉬도록 배려한다.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고, 자신의 심전(心田)을 갈아엎은 적이 없는 괴팍한 사람은 야만인(野蠻人)이다. 야만인은 자신의 욕심과 야망의 노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적이 없고, 제어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타인을 제어함으로 획득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에겐 무질서와 폭력이 법이다." 그 반대가 문명인이다.
 
끝으로 땅의 예찬을 공유한다. "땅은 겸손한 자에게 자신의 품을 연다. 땅은 모든 것을 주었으나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한다. 땅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거나 다투지 않는 부쟁(不爭)의 덕을 가르쳐준다.
 
땅의 주변에는 버려진 존재가 없다. 잡초도 작물도 벌레도 모두 자기 방식대로 존재한다. 벌레를 잡고 잡초를 뽑는 것은 농부의 선택일 뿐이다.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이는 차별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땅이다. 사랑과 증오란 이름으로 축복을 내리거나 저주를 내리지 않는다. 그저 차별하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것이 땅이다.
 
땅은 열릴 때와 닫힐 때를 안다. 겨울에는 문을 닫아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할 시간을 준다. 그리고 봄이 되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세상을 품어준다. 생명은 오로지 땅에 기대어 한 호흡으로 존재한다. 땅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아낌없이 자신의 살을 내주기에 밥 퍼주는 엄마, 식모(食母)라 부를 만하다.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안긴 모든 존재를 품어주는 땅은, 우리의 어머니를 닮았다.
 
노자는 자연(自然)을 알려면 땅(地)을 먼저 배우라고 말한다. 땅에는 하늘의 이치가 담겨 있고, 그 하늘에는 도(道)와 자연의 이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人法地·인법지), 땅은 하늘을 본받고(地法天·지법천), 하늘은 도를 본받고(天法道·천법도),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도법자연).’
 
‘저절로(自) 그러한(然) 것’이 자연이다.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듣는다. 세상에 어떤 일도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없다. 강요와 억지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아서 결코 오랫동안 이어질 수 없다. 우주 어느 하나 자연의 원리에 따라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없을진대 인간 역시 이런 자연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그 자연의 원리가 온전하게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땅이다."(박재희)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언젠가 <경향시선>을 보고 적어 둔 시를 공유한다.
 
 
자연법/권달웅
 
조각달을 앞세우고 간다.
여울물을 기어오르는 피라미처럼
공기주머니 하나 달랑 차고
소유한 게 적어도 물 따라 산다.
 
풀잎에 알을 낳는 풀벌레처럼
주어진 시간 그대로,
청설모가 굴밤 한 톨 물고 가듯
가랑잎 같은 시를
소중히 갈무리하고 산다.
 
소슬한 가을바람 따라 산다.
새빨갛게 익은 석류가
저절로 팍, 하고 깨어지듯
작은 소리를 알아듣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산다.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삶의 자세를 배운다고 말한다. 여울물에 밝게 뜬 편월(片月)을 앞세우고 헤엄치는 피라미는 가진 것이 없어도 물의 흐름에 맞춰서 산다. 풀벌레가 풀잎에 알을 낳고 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청설모가 졸참나무의 열매 한 톨에 만족하듯이 시인은 가랑잎 같은 시 한 편을 짓고 사는 일 외엔 더 바라는 게 없다. 그리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소리와 움직임에 귀를 기울여 잘 알아들으면서 살고자 한다. (…)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호응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나란히 살고자 한다.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고, 잔물결 같은 작은 행복을 찾으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의 현덕(玄德)을 따라 사는 일일 테다. 나무가 너무 뻣뻣하면 꺾어지고, 소나기가 종일 쏟아지는 법은 없다는 지혜를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배운다."(문태준)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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