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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김치찌개 평화론/곽재구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2021년 6월 6일)

어제는 코로나-19의 팬데믹 현상으로 강의를 내 연구실에서 영상녹화로 하였다. 실제로는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할 강의였는데, 포럼 회장님이 직접 녹화 장비를 가지고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셨다.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영광이었고, 보람이었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10여간 인문학 공부를 하고, 제대로 된 인문학 강의를 어제  '거의' 처음 해 본 것이다. 쉽지 않은 무거운 주제였다. "인문학의 시대적 가치-왜 '인문학'인가?" 그동안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하나> 그리고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를 쓰면서, 흩어졌던 생각들을 하나의 줄기로 세워가며, 통합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나 자신도 뿌듯했다.

어제 강의에서 하려고 했던 주제는 '자유"였다. 자유(自由)를 말 그대로 하면,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로 말미암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런 상태이다. 여기서 '말미암다'라는 말이 흥미롭다. "어떤 현상이나 사물 따위가 원인이나 이유가 되다"란 뜻이다. 그래 자유는 일체의 권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저항하는 데서 나온다.

오늘 하려는 다음의 이야기들은 시간이 부족해서 잘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그런 사람은 자유롭다. 거꾸로 자유로워야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이 된다. 우리가 심사숙고한 후 자유로움 속에서 내린 결정은,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상관없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고, 성공과 실패는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실력과는 상관없이, 운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은, 우리가 내린 결정이 최선인가 묻는 것이다. 여기서 최선이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 당면한 문제를 심사숙고해 그 핵심을 간파하고, 지금 당장 괜찮을 뿐만 아니라, 내일에도 괜찮은 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 실패하든 성공하든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괜찮다는 것은, 그 해결 과정이 다른 사람에게도 정정당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고 아름다워야 한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그러한 최선은 혼자 고독하게 결정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는,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린, 소수 몇몇에 의해 진화했다. 그 소수는 고요를 수련해, 그 고요한 시간과 장소가 일깨워주는 ‘양심'의 소리에 복종한 자들이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 예수,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갈릴레오, 단테,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마르틴 루터, 셰익스피어, 괴테,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들이다. 그들은 인류의 삶을 혁신적으로 진보 시키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여는데, 누구와 상의하지 않았다. 이들의 천재성은 대중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결책으로 대중을 한 단계 도약시키고 감동하게 했다.

이런 영웅들은 남들이 감히 가지 않은 위험한 공간인 경계에 진입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신념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초연하게 목숨을 바치는 인간들이어다.
1. 소크라테스는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 깨달음으로 당시 아테네 지식인들에게 그들의 지식이 얼마나 허상인지 거침 없이 공격한다. 그는 스스로 아테네라는 거대한 '말'이 잠들지 않고 최고의 경주마가 되도록 괴롭히고 훈련시키는 '등에'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의 언행은 아테인들에게 신성모독이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고소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몇 마디 말을  궁색하게 지어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스스로 독배를 마셨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그가 아테네 감옥에 감금됐을 때, 간수에게 뇌물을 줘 그를 탈옥시키려고 애를 썼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라는 신생도시를 구축한 ‘법’이 비록 악법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하다고 판단해 독배를 기꺼이 마시고 순교했다. 그는 인류에게 진리를 찾아가는 개인의 '신념'은 목숨을 바쳐 '순교'할 정도로 숭고하다고 가르쳤다.
2. 예수는 1세기 유대사회의 금기를 깨뜨린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을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거룩한 존재'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고 믿었다. 반면 예수는 신이 예루살렘 성전이나 율법에 감금된 화석화된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과 동물 안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과 신이 하나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문다. 그는 더 나아가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행위가 바로 ‘신’이라고 선언했다.  유대인들은 이 거침 없는 청년의 생각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특히 당시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건방진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처단했다. 예수가 신의 경계를 침입하였다는 이유이다.
3.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주장한 것은 당시로서는 ‘황당한’ 주장이었고, 종교재판에 회부될 정도로 중대한 범죄이자 이단이었다. 당시 과학자들과 사람들은 모두 천동설이 진리하고 주장했다. 진리는 대중이 다수결로 우긴다 할지라도, 그 전문성이 없다면, 진부하고 거짓이다.

오늘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사람들을 기리는 날인 현충일(顯忠日)이다. 난 한문 '忠(충)'자를 좋아한다. 풀어 보면 이 거다. '中+心". 한 마음을 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마음을 먹으면, '환患', 즉 '걱정'이 된다. 6월 이쯤 되면 소환하고 싶은 시를 오늘 공유한다.

김치찌개 평화론/곽재구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할,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지만, 1차적으로는 신체적 억압이 제거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이유가 되어 하는 언행은 거침이 없다. 그리고 자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삶에서의 많은 문제들은 자신의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이 우선이다. 자기 인식은 자신을 알려는 마음가짐이고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신을 항상 응시하려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사제나 목사에게 달려가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외부 권위에 의존하려 한다. 외부 권위는 명령하고 억압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일 때가 많다. 실제 우리 사회는 우연히 부여잡은 권위를 가지고 휘두르며 다른 이에게 명령하며 복종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혁은 한 번도 이념, 정책, 교리, 리더의 카리스마를 통해 성취된 적은 없다.

자유를 위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두어,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한 관찰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과 관계에서, 그들이 반응하는 자신을 응시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스스로 수정하려는 수고를 하는 일이다.

내가 살고 세상은 내가 스스로 변혁할 때,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변혁은 외부의 권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식한 것이다. 자기 변혁은 자기가 누군인지 알려는 수고의 부산물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없고, 자기 변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내가 오늘 마주치는 정보들과 사람들을,내가 경험하여 획득한 나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편견을 가진 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유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념과 이념처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일이 없다고 믿는다. 자기 인식을 통해 얻은 자유는 나에게 자연을 편견 없이 탐색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자유로워야 조급해 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된다.

다시 한 번 어제 소환했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울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조르바 식 자유는 붓다의 방식과는 다르다. 붓다는 욕망의 불꽃을 끈 자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자신의 욕망을 아낌없이 태우는 자이다. 그는 욕망에 옭매이지 않는다. 그는 어떤 욕망이든 남김없이 태우며 산다. 매 순간 오감을 열어놓고 노래하며 산다. 한 점 미련 없이, 한 가닥 후회 없이 산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행복 철학에 동의한다. 노예 출신이었던 그는 자유의 개념에서 행복을 도출했다. 노예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므로 신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엄격한 제약을 받는다. 신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속박이 존재한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자유로울지라도 그의 마음이 무엇에 속박되어 있다면 그를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정념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도 그것의 노예라는 게 에픽테토스의 주장이다.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주인으로서 자유를 누릴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인문학을 우리는 liberal arts, 자유를 얻는 기술이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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