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벌써 여름 같다. 한낮에는 햇볕이 따갑다. 아침에 작은 수첩을 뒤적거리다 만난 문장이다. "내가 썩는다는 것은 언제 아는가? 주위에 영혼 없는 아이들이 꼬일 때이다. 음식이 썩으면 제일 먼저 꼬이는 것이 파리인 것 처럼." 그리고 페북이 알려주는 <과거의 오늘>에서 오늘의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문장들을 다시 만났다. 좀 뒤에 공유한다.
인문학은 원리를 다룬다. 어떤 사실이 성립하기 위한 바탕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인문운동은 어떤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문장, 한 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관조하게 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건더기'를 찾아 내는 일이다. 인문학자와 인문운동가는 다르다. 알게 하는 것이 인문학자라면 관심을 갖고 사랑하게 하는 것은 인문운동가의 몫이다. 인문학도 인문지식을 배우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인문정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인문 정신은 인문적 지식을 기능적인 이해의 대상으로만 삼지 않고, 내 삶에 충격을 주는 송곳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이다. 높은 수준의 지식을 송곳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오늘 아침은 그런 인문정신을 고양하는 최진석 교수의 몇 가지 인터뷰들을 다시 소환해 본다.
(1) 위대한 개인은 “자기 사랑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공동체까지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는 이다. 헤세의 <데미안>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을 만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천직)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몇 달 전 『데미안』을 다시 읽고, 다음과 같이 정리한 적 있다. 자신과 하나가 되어,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라는 믿음을 갖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나를 향해 쉼 없이 걷는 것이다."(최진석) 그래야 행복하다. 그게 안 되면 우울하다. 국민일보 이지현 종교 전문 기자는 자신의 칼럼에서 "지금 삶이 우울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라 말했다. 나 자신과 하나가 되지 않은 것이다.
(2) 우리는 감각에 빠져 있다. 이젠 지적으로 성장하는 길로 건너가기를 해야 한다. 두 개, 죽 감각과 지성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예술을 하든, 철학을 하든, 문학을 하든, 사업을 하든 이제 우리는 탁월한 높이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최진석)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 궁극적 질문을 자주 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기능적 단계에서 헤매고, 성과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궁극적 질문 앞에서 몸부림치지 않는다. 삶을, 자기 자신을 궁금해하고, 그 궁극적인 생각을 붙드는 습관을 갖는 게 필요하다. 자기 수련하는 사람은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야 한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도래하면서 기술과 자본이 혁명을 주도하며, 인공지능의 시대라는 4차산업혁명이 진행중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식의 힘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힘이 고양되려면, 생명력인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에로스의 충동에 로고스의 비전을 부과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에서 로고스로 변주되어야 한다.
'건너 가기'에 용기를 내야 한다. 갖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정처(定處)로 정하고, 마치 선정(禪定)에 들 듯이 여기에 편안해 하고 여기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또 이것을 자신만의 진리의 텃밭으로 삼는 한, 이것 다음이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닿기 힘들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장자가 말하는 '정해진 마음(成心)'에 갇혀, 이것에 맞는지 여부에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만 갖게 된다. 그러면 깊이 생각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빠지게 된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감각에 빠지만,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좋고', '나쁨'만 있게 된다. 사유에는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래야 지성이 성장한다. 지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쾌락에 빠진 사람들을 최교수는 게으른 자라고 말한다. 부지런한 자는 감각과 감정을 극복하는 지적인 태도로 사유할 줄 알면서 지성이 빛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를 공유한 다음으로 옮긴다. 인문운동가는 문제가 있어서 패러다임이 붕괴된 상황을 두고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더 이상 붕괴하지 않는 더 튼튼한 시스템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건너 가기'를 감행하는 자이다. 제로 베이스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위기가 기회로 작동되게 하려면, 우선 현 상황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판단중지'라고 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눈을 감고,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으로 보는 거다. 거기다 하나 더 보태면, 침묵하는 것이다. 침묵은 자화자찬에 안달하는 사회에서 스스로 물 아래로 깊이 침잠하는 용기이다. 그때 침묵은 나의 마을을 씻겨 침묵의 소리를 듣게 만든다. 이 유월은 눈을 감고, 침묵하는 시간이다.
심안(心眼)/홍사성
하늘은
구름이 지나가야 보이고요
바람은
나무가 흔들려야 보이지요
사람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지요
다시 최진석 교수의 몇 가지 주장들을 갖고 나의 인문 정신을 더 높게 고양시켜본다.
(3) “예술가들은 무엇을 표현할까 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살피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들어진 예술이 아닌, 튀어나오거나 토해져 나온 것들이어야 감동을 줍니다. 예술적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높이의 영혼을 갖는 것이고, 그런 예술적 높이를 자주 경험한다는 것은 영혼의 승화에 큰 영향을 미치죠. 아름다움으로 부터 받는 충격이 가장 높다고 생각합니다."(최진석)
훈련된 지성적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의 예술 수준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인문학적 높이에서 작동시킨다. 그 때 작동되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창의력과 상상력 (2) 윤리적 민감성 (3) 예술적인 영감. 위에서 말한 '지성'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문(人文)의 흐름을 포착하고, 감동하며 즐거워하는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감동이나 즐거움은 대상이 발산하는 시선과 보는 사람의 시선이 일치할 때 나온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탁월한 시선으로부터 예술이 나온다. 문제는 예술이란 이미 있는 길을 익숙하게 걷는 것이다. 지금의 장소에서 없는 길을 새로 열면서 가는 모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4) "또 예술을 그냥 감상할 때와, 계속 갖고 싶어 소유할 때 그 입장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감상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유해 보니 다른 높이, 색깔의 감동이 오더군요. 예술품으로부터 얻는 감동의 높이로 내가 상승한다는 기분을 갖는 건 너무 행복한 경험이죠.”(최진석)
예능 대신 예술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능은 당장의 시각적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예술은 추상적이지만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전율과 감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만화만, TV 드라ak에만 관심을 두면, 예술을 알 수 없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 예능과 예술은 다르다. 예술의 핵심은 미학적 정서와 철학적 사유이다. 즉 정서적 미학과 철학적 가치라고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감동과 변화이다. 가짜와 진짜는 여기서 판가름 난다.
예능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예능에만 빠진다는 것이다. 예능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생각하며 즐겨야 즐거움이 온다. 그리고 깊은 생각을 하며 예능을 보면 재미가 없다. 예능을 즐기는 이유는 생각하는 수고를 하기 싫어서 이다. 생각하는 데는 힘이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능에만 빠진다면, 그는 분명히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수고를 많이 하다 보면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예능은 그럴 때 즐겨도 충분하다. 큰 폭과 높은 높이가 없이 소확행에만 빠지면 사람이 작아져 버리듯이, 예술 없이 예능에만 빠져도 사람은 쉽게 작아진다.
지금 세상이 거짓말처럼 트로트 열풍에 빠져 있다. 하지만 이 열풍은 어딘가 수상하다. 좋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와 생긴 본질적 흐름이 아니라 ‘음악의 예능화'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빨리 휘발될 이 열풍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건 괴롭다. 가사는 너무 뻔하고 퇴행적이어서, 어떤 건 듣기에도 민망하다. 멜로디엔 미학적 수고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편곡은 열 곡이 한 곡인 듯 기계적 패턴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교태 섞인 꺾기를 가창의 표준으로 삼아, 무대에서 품위를 밀어내 왔다. 어느 음악학자는 트로트의 미덕이 솔직함이라 했다. 솔직함은 삶을 대면하는 솔직한 태도여야 하지, 감정을 여과없이 쏟아내는 미학적 방기여선 안될 것이다. 이주엽이라는 작사가의 주장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5) 최진석 교수는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내가 승화된다는 걸 알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음악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가장 예술적인 것은 ‘의외성'에서 온다고 했다. 누구나 생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 세상일도 잘 하려고 해서 잘하는 확률보다는 ‘다르게’ 하다가 잘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설명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지금보다 나은 우리가 돼 보자는 것이다.” 음악은 쉴 곳 모르는 마음의 피신처이다.언어로 사유하고 언어로 욕망하는 우리 인간에게 음악만큼 완벽한 피난처는 없다. 언어는 가끔 사심없이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욕망과 결핍을 자극하는 폭주장치가 되기도 한다. 우리를 잠시 언어에서 탈출시켜, 선율과 리듬이 인도하는 무한한 감성의 세계로 이끄는 음악이야 말로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명곡이 된다. 어떤 음악은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지나친 욕심이 씻겨 나가고 오직 '사랑하는 존재'로서 내 삶을 가꿔가겠다는 든든한 결심이, 불안에 휩싸인 영혼을 달래 준다.
<소학>의 주석서인 <집해>에 이런 문장이 있다. "곧은 자는 반드시 온화함이 부족하므로 온화하고자 하고, 너그러운 자는 반드시 그 엄숙함이 모자라니 한쪽으로 편벽될까 염려하며 보충하는 것이고, 강한 자는 반드시 오만함에 이르므로 그 오만함을 없애고자 하니, 그 지나침을 막아서 경계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주자(고관대작의 맏아들)를 가르치는 자는 이같이 하되 그 가르지는 바의 도구는 오로지 음악에 있으니, 음악은 사람에게 중화의 덕을 길러서 그 기질의 편벽됨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긴장과 이완의 균형 맞추기를 하는 것처럼, 곧음에 온화함을, 너그러움에 엄숙함을, 강함에 겸손함을 더하는 것이 바로 중용의 덕인데, 음악이 그걸 길러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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