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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징기스칸 어록'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2일)

도를 깨우친 사람은 정말로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도통(道通)한 사람이라 한다. 예컨대, 어려운 수학 문제를 계산기도 없이 술술 잘 풀거나 어려운 일을 쉽게 잘 해결하는 사람을 두고 ‘도사 같다’ 또는 ‘도가 통했다'는 표현을 쓴다. 험한 산길을 힘들이지 않고 잘 올라가는 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한다. 이 때 쓰는 '도'라는 표현이, 오늘 우리가 읽는, 제27장에서 노자가 말하는 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장자는 "득도한 자는 세상과 우주의 이치(理)에 밝아서 그때 그때 상황을 잘 살펴, (즉 도통하여) 매우 적절한 행동(權)을 하기 때문에 해를 당하지 않는다" (<<장자>>, "추수")고 했다. 이 적절한 행동 하나하나가 쌓이고 쌓여서 우주적 차원의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득도한 사람은 우주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나도 이젠 지구를 넘어 우주적 삶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은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일을 잘 수행하는 활동성에 초점을 맞춰 말한다면, '도통(道通)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궁극적 사명은 득도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우주 질서에 맞는 적절한 행동 하나하나를 쌓는다면, 우주적 성취를 해내게 되는 단계까지 도달한다고 하니. 일상의 작은 행동도 도통의 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어야(得) 하는 도(道)는 어떤 모습일까? 도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움직임이나 모습이 감각적 수단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위무형(無爲無形),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다.

도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세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만져지는 것보다 더 세다. 도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고, 가장 만져지지 않는 것이다, 가장 높아서 가장 세다. 따라서 노자는 '도'를 억지로 개념화하여 '크다(大)'고 하였는데, 이 '크다'는 말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전체 우주의 존재 원칙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전체는 가만히 있는 정지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부단한 운동 속에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 빠뜨리는 곳이 없는 부단한 운동의 방향은 먼 곳을 향하여 있는데, 이는 어떤 극한을 향하여 간다는 뜻으로 보았다. 사물의 발전은 극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그 극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전체 자연의 운행 모습이었다. '대(大)→서(逝)→원(遠)→반(反)'은 전체 운행의, 즉 도의 운행을 나타내는 전략 아래 동원된 유기적 의미 연관 고리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 어떤 것도 '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득도(得道)의 길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가까운 것과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영역에 가까운 쪽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면 된다. 예컨대,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적인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도에 먼 쪽의 것이 보내는 유혹을 이겨내고, 가까운 쪽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를 발휘하여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는 승리를 한 번 경험하면서 우리는 점점 우주적 삶의 경지로 이동한다. 결국 우주적 삶은 모순적 상황에 처한 매우 미미하고 고독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하는 그 찰나적 순간에서만 피어난다. 이 용기가 여기 멈춰 있는 나를 저기로 건너가게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노자는 이런 상황을 "습명(襲明)"이라 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자기는 여지없이 깨지고 알지 못했던 곳으로 도달해간다. 여기 있는 자기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저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미미한 자신에게 '그렇다면 나는?'이라는 질문을 계속 해대면서 일상에서 작은 승리를 경험 시키는 일이 바로 우주적 삶이다.

그런 '도'에 따른 행동의 완벽성을 제27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善行無轍迹(선행무철적) : 잘 걷는(잘 가는) 사람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善言無瑕謫(선언무하적) : 잘 하는 말에는 흠이 없으며
善數不用籌策(선수불용주책) : 셈을 잘하는 사람은 계산기를 쓰지 않는다.
善閉無關楗而不可開(선폐무관건이불가개) : 잘 닫힌 문은 빗장을 걸어 놓지 않아도 열 수 없고
(관건-關楗-은 '어떤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란 말로 쓰인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결무승약이불가해) : 잘 된 매듭은 꽉 졸라매지 않아도 풀 수 없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티 나지 않게 자신의 업무를 매끄럽게 처리하지만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은 무리수나 편법을 동원하다가 뒤탈을 남긴다. 잘 걷는 사람이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거나 훌륭한 말이 흠을 남기지 않는다는 문장도 이런 각도에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밤중 고양이와 사람의 걸음걸이를 비교해보자. 고양이는 소리도 흔적도 없이 어느 틈에 안방 의자 위에 올라와 있다. 내 딸은 부엌에 물을 먹으러 올 때면 꼭 쿵쾅쿵쾅 거린다. 걸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고양이는 사람보다 더 도가 통했다.

인위적인 단계를 넘어 도와 하나된 경지에 이르면, '나'라고 하는 것은 없어지고, '도마'만 있는 상태이므로 결국 내가 하는 모든 석은 도가 하는 일이 되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인위적인 흔적이나 흠은 사라져 버린다는 거다. 셈을 잘 하는 사람, 잘 닫힌 문, 잘 매진 매듭도 같은 맥락의 비유다. 셈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계산기가 불필요한 군더더기이며 잘 닫힌 문에게는 빗장이 불필요한 잉여다. 제24장에서 나온 것처럼, 도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것들은 '여식췌행(餘食贅行)"인 것이다. 자연은 선풍기가 없이도 바람을 잘 일으키며, 물레방아가 없어도 물을 잘 흘러가게 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선풍기와 물레방아는 자연에 덧댄 군더더기이다.

도에는 "여식췌행"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 미니멀리즘이 도를 닮은 행동이다. 원문은 이 거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봄을 앞당기려고 겨울을 짧게 하지도 않고, 앞서 가는 물을 추월하려고 덜미를 잡지도 않는다. 자연처럼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스스로를 드러낸다 거나, 스스로 으스대고 자랑하는 행동도 자연스럽지 않다. 노자는 이러한 것을 "여식췌행", 즉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과 같다고 말한다.

드디어 선거의 계절이 다 지나갔다. 원치 않았던 후보들이 당선되었지만, 오늘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사람을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변화가 '도(道)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똑 부러지게 구분을 잘 하는 사람이 유능해 보이지만 노자가 말하는 도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반대다. 구분을 잘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혹된 것이라 했다. 구분하다 보면 차별하게 되고 차별하다 보면 가려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제되는 사람이나 사물, 잉여가 생기게 된다. 도에는 잉여가 없기 때문에 구분은 도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제 만난 '징기스칸 어록'이 소환되었다. "나에게서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드디어/징기스칸이 되었다." 오늘 아침 사진 처럼, 우리는 나아간다. 담쟁이처럼,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도종환, <담쟁이> 일부). 이어지는 제27장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힘들다고
그래서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과감히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곁에 서성거리고 손상을 입혔고
걸림돌이 되고 내 곁에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목숨을 걸고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에게서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드디어
징기스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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