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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날/이성복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31일)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홍세화는 난민이었다. 1979년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체류 중이었던 그는 한국에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이 터지는 것을 보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난민으로 인정받아 이주노동자로 생활하며, 지금도 그를 대표하는 저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펴내 한국 사회에 '톨레랑스'(관용) 열풍을 일으켰다. 1999년 5월 28일, 지금으로부터 꼭 23년 전에 그는 한국 땅을 밟았다. 2002년에는 '영구 귀국'을 했다. 하지만 23년 동안 그는 울퉁불퉁한 길만 골라 다녔다. 잡지 <아웃사이더>를 창간했던 1999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웃사이더'다. 동시에 그는 '자유인'으로 산다. 그래서 성역이 없다. 수많은 칼럼과 책을 집필하면서 언제나 한국 사회의 핵심적 문제를 겨눠왔다. 벌금을 낼 돈이 없어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람들을 돕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 외국인보호소를 방문하는 시민모임 '마중'의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76살, 여전히 그는 최전선에 있다.

그가 벌써 76세란다. 내가 먹은 나이는 모르고, 다른 사람의 먹은 나이에 가끔씩 놀란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오늘의 우리 사회 현실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출범에 따른 사회 공공성 악화와 이로 인한 노동자와 서민의 고통을 우려했고, 민주당의 모습에는 여전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진보 세력'이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에도 그는 솔직했다.  진보 세력들은 "겸손하지 못했고, 학습이 부족했다"라고 성찰했다. 50.4%. 지난 20대 대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심상정 후보, 진보정당 후보들이 받은 득표율을 합한 수치가 50,4%였다. 과반 이상의 국민들이 여전히 '개혁'과 '진보 정치'를 소망했다. 그런데 촛불 항쟁으로 탄생한 정부임에도 5년 만에 정권을 빼앗긴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뤄야 했던 '진전'이 거의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는 실망감이 워낙 컸죠. 조국 사태를 통해서 보여준 '내로남불'은 국민의힘과 '차이가 없다'는 인식을 가져오게 만들기도 했고요. 또 권위주의 독재 시절의 인물이나 상황을 전제하고 그 속에서 (민주화 세력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정치적인 세력화를 하기에는 시기가 많이 지났잖아요. 그런 점에서 민주당은 '반대'는 무척 잘하지만 뭔가를 이루는 것에는 아무런 준비도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민생 문제에서는 일자리, 부동산, 집, 교육 문제에서 실패했죠. 부동산은 완전히 실패. 교육은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요. 일자리 문제에서도 최저임금 상승 등 뭔가를 많이 해보려고 했지만 역풍이 불자 바로 손을 놔버리면서 국민의힘 세력과 차별성을 두지 못했던 것이 결국 민주당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게 하는 결과를 빚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우경화 현상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홍세화의 주장을 들어본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국제 정치를 분석하면서 '브라만 좌파'(지식 엘리트)와 '상인 우파'(자산 엘리트)가 교대 집권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피케티는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로 인해 전반적인 우경화 현상이 일어난 것을 노동자 정당이 실종된 원인으로 지적합니다. 한국은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이라기보다는 권위주의 독재를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요."

나도 지난 5월 24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라 돌아가는 꼴이 왜 이 모양일까?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망쳐 놓았다고 본다. 박가분 작가에 의하면, ""엘리트 대다수는 자신을 그 자리에 오게끔 해준 이 사회에 대한 ‘빚’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사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비판의 날을 세운 대상도 그러한 사회적 유대감을 상실한 엘리트의 정신적 퇴폐다. 대중도 이런 속내를 알기에 신뢰하기는 커녕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솔직하게 그런 면이 많다. 홍세화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저는 국민의힘은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세력'이고, 민주당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세력'이라고 표현해요. 저는 586이 20대 때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데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진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숙화된 상황에서 뭘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고, 실천도 잘 보이지 않아요.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하려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것이 그나마 야당으로서 노동자·서민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비관적 전망을 갖는 이유는 그들의 계급적인 지향 역시 '프티 부르주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에요. 조국 사태 때 '안 그런 사람 어디 있냐' 식의 태도를 취한다든가, 서초동 집회에서 '우리가 조국이다'를 이야기하는 것만 해도 그래요."

이젠 엘리트 대 반엘리트의 싸움이다. "자칭 좌파{브라만 좌파 엘리트}라는 자들은 PC(정치적 올바름)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통해 대중을 가르치려 들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구별 짓기’ 하려 했다. 반대로 우파[상인 우파, 자산 엘리트]라는 자들은 더욱 노골적인 능력주의적 사고로 빠져든 채 엘리트의 '지대(地代)추구행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비 등의 비생산적인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소비하는 일체의 활동)와 지위 대물림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자정 노력 자체를 상실하고 있다. 저 둘은 달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더 이상 ‘보통 사람’에게 공감할 수 없게 된 엘리트들의 비루한 민 낯"이라고 분석하며, 박가분 작가도 홍세화와 의견을 같이 했다.

"『21세기 자본』으로 유명세를 떨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오늘날 서구사회 정치를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가 주도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들 모두 대중의 이해를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트럼피즘이나 브렉시트가 나왔다. 어리석은 ‘트럼프 지지자’ 혹은 ‘브렉시트 찬성파’라며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박가분) 내 생각도 진짜 문제는 바로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대안은 지금도 늦지 안 했다. 소위 좌파 세력들이 제도 속으로 빨리 들어가야 한다. 독일의 68혁명 세대들은 1970년대에 교육계와 언론계로 진출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분야가 68혁명 정신을 사회적으로 정착 시키고, 영속 시키기에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사람들은 당시에 "제도 속으로의 행진"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제도 속으로 들어가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 한국의 86세대는 한국의 엘리트 교육 시스템, 학벌 계급 사회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들의 일부가 사교육계의 큰손으로 사교육 기업을 이끌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아쉬운 일이다. 이 문제가 한국이 성공적인 정치 민주화와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이 된 현실과 상당한 연관 관계가 있다는 김 누리 교수의 주장이다. 나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홍세화의 지적 처럼, 한국의 '진보 세력'이 성찰하고 반성해야 될 점은 "크게 두 가지, '겸손하지 못함'과 '학습 부족'의 문제"이다. "먼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모순', 이를테면 '계급 모순', '민족 모순' 등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순에 대해서 '이것만 해결되면 다른 모순도 다 해결된다'는 식의 배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겸손해야 된다". "내가 주장하는 바가 옳은 만큼 상대방의 주장도 옳은 부분이 있다는 점, 내 주장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한 열린 자세가 너무 부족했다." "또 '학습 부족'의 측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진보적이거나 비판적인 안목을 갖는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안고 어린 시절부터 고민 속에서 생각을 형성한 게 아니라, 그저 어떤 선배를 만나고 그 선배를 통해서 정파까지 정했다. 그러니까 세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총체성, 보편성이 결여돼 있는데 스스로 그렇게 느끼질 않는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주장만 내세우고,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 전반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는 동료들을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으로 봤다. 심지어는 극복해야 하는 기득권보다 동료들에게 더 적대감을 표출했다." 이런 말들을 새겨 듣고 다시 시작하는 거다.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이고 화요일이다. 매주 화요일마다 서울에 강의가 있었는데, 이번 주부터 몇 달 간 쉬기로 했다. 그래 오늘 아침도 긴 글을 썼다. 내일은 동시 지방선거일이다. 그러니까 오늘이 법정 선거 운동의 마지막 날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지방 정부들이 어떻게 꾸며질지 걱정이다. 이런 저런 염려와 불안이 내 속에 가득하지만, 그 원인들을 해명할 수 없어 불만이었는데, 홍세화의 최근 인터뷰를 어제 읽게 되었다. 거기서 중요한 담론들을 문자화 할 수 있었다. 그것들을 오늘 아침 공유한 것이다. 내일 선거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성복 시인의 <그날>이라는 시를 다시 공유한다. 이 시를 읽으며 아픈 것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병들 음'을 모르는 것이다. 살이 썩고 뼈가 삭는데 아무도 진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고통이 아니면 짐짓 모른 체 하는, 아예 모른 체 해버리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시선을 두지도 않는 무관심으로 똘똘 뭉친 이기적인 세상. 이성복 시인의 <그날>은 과거의 그날이 아니라, 현재의 '그날', 즉 오늘의 우리 자화상을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사진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매실이다. 자연을 말 없이 자기 할 일은 한다.

그날/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사진하나_시하나 #이성복 #반엘리트주의 #홍세화 #도덕경_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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