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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아득한 한 뼘/권대웅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17일)

어제 못다한 노자 <<도덕경>> 제25장의 마지막 구절,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대(四大)' 중, 앞 구절에서의 '왕(王)'이 '인(人)'으로 바뀐다. 인법지(人法地)에서 '인'은 보편적 상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개별적 인간들이다. 인간들은 일차적으로 땅위에서 살아간다. 땅이 생성하는 것들을 먹고 산다. 땅은 "싣는다(載)'라는 표현을 잘 쓰지만, 그것은 온갖 생명을 생성해낸다는 뜻이다. <<장자>>의 "덕충부"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땅은 모든 것을 실어준다. "천무불복, 지무부재(天無不覆, 地無不載 하늘은 만물을 덮고 땅은 만물을 싣고 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을 알고 보면 다 땅에서 나온다. 땅이 변화한 것이다. 채소도 고기도 물도 모든 것이 땅의 변형태이다. 이것을 노자는 '인법지'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땅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완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땅은 반드시 하늘의 조건에 따라 생생(生生)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땅과 하늘의 협업체계가 생명의 기본 구조(structure)이다. 땅이 현실이라면, 하늘은 이상이다. 하늘의 조건에 따라 땅의 한정성이 구체화된다. 이것을 노자는 '지법천(地法天)'이라 표현했다. "인법지(人法地)" 그 자체가 "지법천(지법천)"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늘의 이상을 보통 "덮는다(覆)"라 표현한다.

<<주역>>에서 역(易)은 "낳고 낳는 것을 일러 말한다(生生之謂易)"이로 해석된다. 그러니 인간은 이 '생생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 일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를 "존재의 GPS"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하늘은 텅 비어 있지만 변화무쌍하다. 그럼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낳고 또 낳을' 수 있다. 그것을 일러 하늘의 무늬, '천문(天文)'이라 한다. 그 다음, 몸을 굽혀 땅의 이치를 살펴야 한다. 땅은 조밀하고 구체적이며 견고하다. 그래서 만물을 두루 포용할 수 있다. 그것을 일러 지리(地理)라고 한다. 천문과 지리, 그 사이에서 인사(人事)가 결정된다. 천문과 지문 그리고 인사의 삼중주가 한 인간 존재가 만들어 내는 삼중주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이 인사(人事)를 하는 행위를 우리는 문화(文化)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문명(文明)이다. '경작(耕作)'하지 않고 문화에서 나오는 문명을 기대할 수 없다. 문화라는 단어의 어원이 잘 말해준다. 배철현 교수는 최근 자신의 <묵상>글에 다음과 같이 문화를 잘 정의했다. "‘문화’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컬쳐(culture)는 ‘땅을 개간하다, 돌보다’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동사 ‘콜레레(colere)의 과거 분사형인 ‘쿨투라(cultura)에서 파생되었다. 그 의미는 ‘관리된 것, 개간된 것’이란 의미다. ‘문화적인 인간’이란 자신을 관리한 사람, 자신의 마음을 갈아엎은 자다. 그(녀)는 그곳에 새로운 종자의 씨를 심고, 그 씨가 발아하고 자라나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사람들이 그 나무가 자비롭게 주는 그늘에서 쉬도록 배려한다.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고, 자신의 심전(心田)을 갈아엎은 적이 없는 괴팍한 사람은 야만인(野蠻人)이다. 야만인은 자신의 욕심과 야망의 노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적이 없고, 제어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타인을 제어함으로 획득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에겐 무질서와 폭력이 법이다." 그 반대가 문명인이다. 나는 별도로 한 공간을 마련하여, 그 곳을 "세심실(洗心室)"라 이름을 짓고 마음의 밭을 갈고 있다.

<<주역>>의 "관어천문 찰어지리(觀於天文, 察於地理)"가 '생생의 이치'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할 때는 이 8자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말을 줄이면 '관찰(觀察)'이다. 이 말은 천문을 보고, 지리를 살핀다는 말이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일차적으로 관찰을 통해서 습득된다. 안다는 것은 이 관찰에 의해서 형성된 그 무엇이다. 관찰은 인간이 세상과 교류하는 통로이며,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초석이다.

한문으로 관찰의 낱말 풀이를 해 본다. 관(觀)은 황새(雚)가 큰 눈을 뜨고 본다(見)이다. 또는 황새가 하늘에 날아 올라 세상을 크게 본다는 뜻으로 객관적인 세상을 크게 조망해 본다는 의미가 있다. 찰(察)은 집(宗)에서 제사(祭)를 올리며 신의 뜻을 알아낸다는 뜻으로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사물과 상황의 진의를 파악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관'은 하늘을 보며 세상을 크게 조망하는 것이고, '찰'은 땅을 굽어 보며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관찰은 큰 흐름의 줄기를 보고, 세부적인 일의 정황을 파악한다는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다. 큰 흐름만 보고 세부적인 정황에 대한 살핌이 없으면 두루뭉술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세부적인 정황만 살피고 큰 흐름을 보지 못하면 그 정황의 정확한 주소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관찰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적인 세상을 보는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던져 놓고, 던져진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것도 관찰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과 존재를 관찰하는 데, 우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 다음 큰 흐름을 보고, 세부적인 정황을 살펴 본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한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그 무엇을 또한 관찰한다.

요약하면, <<주역>> "계사전" 제4장의 "우러러서는 천문을 보고(仰以觀於天文, 앙이관어천문), 구부려서는 지리를 살핀다(俯以察於地理, 부이찰어지리)"에서 "관어천문, 찰어지리"가 나온 것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인 천문은 관(觀)하고, 땅의 이치인 지리(地理)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국면인 하늘의 이치는 관(觀)하고, 구체적인 땅의 이치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관'과 ''찰"이 겸해질 때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게 되는 셈이다.

다시 <<도덕경>> 제25장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지법천(地法天)"에서 하늘은 땅과 교섭하면서 양자의 관계에서만 생성을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포섭적 법칙성(=도, 길)에 의존하려 한다. 하늘과 땅을 포섭하는 존재 그 자체와 교섭하는 것이다. 도(道)는 하늘과 땅의 양면을 다 포섭하는 혼융한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도는 신이며, 데우스이며, 만물의 근원이며, 모든 초월의 귀속이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노자는 서슴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도(道)는 그 천지보다 더 먼저 생긴 혼성의 물이며, 더 궁극적인 존재 그 자체인 "스스로 그러함(자연)"을 본받는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는 거다. 이 "도법자연" 이야기는 내일 더 할 생각이다.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말이 쉽게 이애가 되지 않아서 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총 5회 나온다(제17장, 제23장, 제25장, 제51장, 제64장). 한국어는 다음절어이지만, 고전 중국어는 단음절어이다. 다음절어라는 말은 형태소가 여러 음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예컨대, 아버지는 아, 버, 지라는 단음절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합쳐져야만 의미를 전한다. 한문은 하나의 음절이 형태소가 된다. 따라서 '자연'은 하나의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가 아니라, 음절이 독립된 의미를 전하는 술부적 문장이다. 자연은 자연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단지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이 합쳐져, '스스로 그러하다'로 읽어야 한다는 거다. "희언자연(希言自然)"도 '자연은 말이 없다'가 아니라,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거다. "도법자연"도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가 아니라,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라고 해야 한다는 거다. "더 이어지는 "도법자연" 이야기는 내일 한 번 더 한다.

서양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플라톤의 우주론을 인용해 본다. "우주에는 우리 삶을 이끄는 섭리(섭리-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providence)가 담겨 있고,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인간은 그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인간을 이루는 물질적 원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인간의 삶을 훌륭하게 이끄는 원인이다." 즉 그에게 "'자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풀어 줄 열쇠였다. 플라톤은 하늘 속에 담긴 땅의 모습을 보았고, 땅 위에 펼쳐진 하늘의 원리를 읽었다." (신근영, <삶을 노래하는 우주>, 채운 수정 기획 엮음 <<고전톡톡>>)

이 관찰이 앎의 시작이고 본질이다. 이 앎과 함께 인간의 길이 시작된다. 인생이란 길 위에서 '길' 찾기 이다. 그래 안다는 것은 구도(求道) 행위이고, 그런 사람은 다 구도자(求道者)이다. 나도 구도자로 살려고 애쓴다. 이러한 길을 찾을 때 필요한 것이 지도이다. 그러니까 앎이란 지도인 것이다. 앎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처없이 방황할 수 있다. 그래 무지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무지는 그 자체로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나에게 아침마다 쓰는 <인문 일기>는 일종의 내 삶의 지도, 아니 네비게이션이다.

무지로 헤매다가, 길을 찾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고 한다. 지혜의 출발이다. 그때 존재는 환희로 넘친다. 희열과 기쁨을 맛본다. 그래 사람들은 공부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만끽한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 눈 있는 자가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러 올리듯, 그 희열은 평온함으로, 평온함은 오롯한 집중력으로 변주되어 다시는 길을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끔씩 나에게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아직도 "아득한 한 뼘"이다.

아득한 한 뼘/권대웅

멀리서 당신이 보고 있는 달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한 동네지요
이곳 속 저 곳
은하수를 건너가는 달팽이처럼
달을 향해 내가 가고
당신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움은 오래되면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달 속에 달이 뜨고 또 떠서
우리는 몇 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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