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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29일)

어제는 하루 종일 초여름 같은 날씨에 "대청호수변공원"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의 이름으로 플리마켓에 참석하며 하루를 다 바치었다. 머리 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많은 어린 아이들 속에 있어서 였다.

오늘은 다시 집 나간 영혼을 되찾기 위해, 조용한 시간들을 보낼 생각이다. 그래 다시 노자 <<도덕경>>을 펼쳤다. 오늘 <인문 일기>는, 지난 27일에 했던, 제 26장 두 번째 문장, "是以聖人終日行(시이성인종일행) 不離輜重(불리치중)", 그 뜻이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정밀 독해를 할 생각이다.

나는 지난 제25장에서 "인법지(人法地)"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땅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땅의 어떤 면을 본받아야 할까? 그것은 땅의 '무거움'이다. 땅은 무거운 것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  특히 리더는 땅의 이러한 묵직함을 본받아 중후하고 침착해야 한다는 거다. 경박하거나 조급하거나 초조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안달하거나 덤벙거리거나 촐랑거리거나 부산을 떨지 말고 땅처럼 의연해야 한다는 거다.

땅은 스스로 무거울 뿐만 아니라 산이나 호수나 바다 등 온갖 무거운 것을 지고 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거다. 그래 사람, 특히 리더는 무거운 짐지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성인은 짐수레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지 않고, 짐수레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져 버리고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짐, 사회의 짐, 형제의 짐을 대신 져야 한다. 남의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맡아야 한다.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명 연설이 기억난다.

2004년 7월에 당시 미국 대선에 출마한 존 케리 상원 의원을 지명하는 자리에서 그가 한 기조연설이다. 그는 '미국은 하나'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은 저에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 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녀가 내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내 삶마저 가난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아랍계 미국인 가족이 변호사 선임을 못한 채 혹은 정당한 법적인 절차 없이 체포 당했다면, 그것은 나의 시민권 침해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근본적인 믿음입니다. 나는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나는 내 여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나는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 문장이 감동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장이 이 거다. "雖有榮觀(수유영관) 燕處超然(연처초연)". 이 말은 "비록 영화로운 기거 속에 살더라도 한가로이 처하며, 초연(超然)이 세속의 영화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거다. 자신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져 버리고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구경거리나 신나는 일이 있더라도 들뜨거나 거기에 정신을 팔지 않는다. 여기서 "연처(燕處)"는 '제비 둥우리"라는 등 여러 가지 풀이가 있지만, '한가하게 거한다'는 뜻으로 제자리를 지킬 뿐 분주하게 쏘다니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오강남의 해석이다.

어떤 그럴듯한 유혹이나 꾐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을 허둥지둥 따라가는 등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풀이하고 싶다. 사물을 높은 차원에 내려다 보기 때문에 사물의 어느 한 면만 볼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단견, 이로 인한 흥분, 조바심 같은 것에 지배되지 않고 자기의 기본 자세에서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하고, 초연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거다.

여기서 초연(超然)", "의연(毅然)"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초연하다'는 말은 '얽매이지 않고 태연하거나 느긋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의연하다'는 말은 '의지가 강하고 굳세어 끄떡없다'는 말이다. <<장자>> 제5편 "덕충부"에서, 장자는 형벌로 발이 잘린 왕태를 빌려 다가, 용심(用心, 마음 씀)의 길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면서, 초연이니 의연이니 하는 말을 한다.
▪ 생사(生死, 삶과 죽음)에 초연하라. 나는 '생사초연(生死超然)'으로 기억할 생각이다. 살고 죽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 천지개벽 같은 상황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꿈쩍하지 않는 의연하고 의젓한 사람이 되라. 나는 '태연자약(泰然自若)'으로 기억할 생각이다.
▪ 거짓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 보고(審乎無假 심호무가), 사물의 변화에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라. 무가(無假)는 '거짓이 없는 것'으로  완벽한 경지, 궁극 실체의 경지를 뜻한다. 즉 가짜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심(審)자에 방점을 찍는다. 숙고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면 '불여물천(不與物遷)', 즉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변화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즉 '명물지화(命物之化)'하고, "이수기종야(而守其宗也)"하라. 사물의 변화를 천명에 맡긴 채, 도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다. '수종(水宗, 도의 근본을 지키는 것)'하는 거다 . 같이 책을 읽는 우경은 '도의 근본(守宗)'이란 "불리지당지극(不離至當之極)"이라 알려 주었다. 마음 씀은 '지극히 마땅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에 따르면, 진인(眞人)은 자연의 덕과 합치된 지혜로운 사람으로 그 무엇에도 제약 받지 않고 만물과 하나 되어 자유로운 삶을 사는 존재로 영적인 인간이다. 다시 말하면, 무위(無爲)를 실천함으로써 세속적 굴레를 벗어버린 인간이다. 진인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지 않아서 사소한 것을 대하더라도 거절하지 않고, 공적을 쌓아도 자랑하지 않으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은 꾸미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진인의 삶이다. 보통 사람은 현실 세계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외물(外物)에 집착하고 구애 받는다. 이에 반해 진인은 모든 분별을 벗어났기에 어떠한 얽매임도 없이 정신적인 자유를 누린다. 예를 들어, 진인이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은 그가 실제로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가 아니다. 진인의 정신이 외물에 얽매이지 않아 걸림이 없는 경지에 있음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렇듯 진인은 외물의 구애됨에 벗어나 정신적 행복을 누리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게 되는 이상적 존재이다. 곡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격이 최상의 경지에 이른 존재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다. 사물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산다. 그 진인은 "소연이왕, 소연이래이이의(翛然而往, 翛然而來已矣)"라 한다.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나며, 홀가분하게 [세상에] 태어날 따름이다.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나는 '소연(翛然)'을 나는 '홀가분하게'로 풀이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홀연히' 또는 "의연하게'로 말하기도 한다. '홀연(忽然)'은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로, '의연(毅然)'은 '의지가 굳세어서 끄덕 없이"로 풀이된다. '홀가분하게'은 거추장스럽지 아니하고 가볍고 편안하게'로 정의된다. 소(翛)자가 '날개 찢어질 소'자이다. 어려운 한자이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소연(所然)은 '그러한 까닭'의 뜻으로 사용된다.

'초연', '의연, '홀연', '소연' 등이라는 말들이 다 비슷하지만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처연(凄然)이라는 말도 좀 이야기를 해 본다.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개가 아니라, 늑대이고 싶다. 늑대의 처연함, 의연함을 배우고 싶다." 처연함은 눈앞의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 너머를 보는 데서 나온다. 의연함은 들썩거림이 없이 미끄러지듯 활주하는 데서 나온다. 늑대는 항상 스스로 고독을 불러들인다. 이 고독의 깊이가 눈으로 들어가 쓸쓸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나도 처연한 눈빛을 만들 것이다. 고독을 받아들여서.

강한 자의 눈빛은 쓸쓸하다. 쓸쓸한 눈빛은 고독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고독을 감당하는 자라야 강하다.  혼자 있으면서도, 편안할 수 있는 일은 매우 깊은 내공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하다. 혼자서 그 고독의 깊이를 온통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자신의 그릇 함량을 재 보고 싶은 사람은 무조건 익숙한 자신을 벗어나 떠나보아야 한다. 단순히 공간만의 떠남이 아니라, 자기를 지배하던 이념과 신념이 결부된 시간의 문제도 다 버리는 것이다. 고독은 그 고독을 자초(自招)할 힘이 있는 사람에게 서라야 비로소 고독 그 자체로 현현(顯顯)된다. 강제된 고독은 그저 불편이나 고통일 뿐이다. '자초한 고독' 속에서 고독을 즐겨야  혼자를 즐길 수 있다.

그러면서 장자가 말한 것 처럼, "봄날처럼 따뜻하면서도, 가을처럼 처연하게(처연이추, 난연이춘 淒然以秋, 煖然以春)"(<<장자>>, "대종사" 6), '위대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개 같은 눈빛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늑대의 쓸쓸한 눈을 유지할 생각이다.
늑대의 털은 쓸쓸한 눈빛을 데우지 못한다.

재래시장에서 만나는 식용견의 눈은 외부세계를 경계하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식용견의 눈빛은 순하고, 초점이 분명치 않아서 개가 어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처연이라는 말은 두 개의 한자가 있다. 하나는 처연(悽然)하다'로 쓰이며, '애달프고 구슬프다' 란 뜻이다. 예를 들어 '처연한 내 신세'라고 말한다. 그리고 처연(凄然)은 '기운이 차고 쓸쓸하다'란 말이다. 이 '처(凄)'는 '쓸쓸할 처'자이다.

"처연이추, 난연이춘(봄날처럼 따뜻하면서도, 가을처럼 처연하게)'라는 말이 좋다.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처연'과 '난연'이 말이다. 어제 대청호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에서 난 '난연"을 읽었다.

노자 제26장의 마지막 두 문장, "柰何萬乘之主(내하만승지주) 而以身輕天下(이이신경천하): 하늘 아래 그 몸을 가벼이 굴릴 수 있으리요?)와 輕則失本(경즉실본) 躁則失君(조즉실군): 가벼이 하면 그 뿌리를 잃고, 조급히 하면 그 우두머리됨을 잃는다)는 말은 내일로 넘긴다.

마지막으로 '홀연(忽然)'을 생각하다. 류시화 시인의 시가 기억났다. 그걸 공유한다. 나의 다짐이기도 하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메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의 여행을 방해한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 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가는 실이라도 묶인 새는 날지 못한다.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데려간다. 새만 되돌아보지 않는다. '쟁기를 잡았으면 되돌아보지 말라'는 금언도 있다. 운전대 잡은 사람은 뒤를 보면서 앞으로 갈 수는 없을 터이다. 이처럼, 멋진 삶은 뒤돌아보지 말고, 더 나아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이다. 떠날 때는 홀연히 떠나는 것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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