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4월 16일)
자연은 그대로 거기 있다. 자연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상관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주의 시간표에 따라 변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자연은 푸르름을 더해 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연두이다. 연두는 새로 갓 나온 잎의 빛깔이다. 연한 초록의 빛깔이다. 맑은 초록 혹은 조금은 덜 짙은 초록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나도,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인처럼, 봄이 연둣빛 거기 까지만 이르렀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왜냐하면 연두 빛은 풋풋하고, 순수하고, 설레고,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속되지 않고, 마음이 맑고 신선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조금은 들떠 두근거리고, 일렁거리고, 조심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의 자세가 연두의 속뜻일 것이다. 우리 본래의 마음 그 어귀가 바로 이 연두의 빛깔일 것이다.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지 안 했다. 내가 아닌 타인이 결정하는 것이니, 난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지구가 반쪽 나고, 내 삶이 흐트러지는 건 아니다. 앞문이 닫히면 뒷문이 열리는 게 인생사이다. 그러나 삶을 좀 더 단순하게 정리하며, 내 소명에 몰입하고 싶다. 거리의 나무들처럼 말이다. 매주 금요일은 동양 고전 이야기를 하는 날이다. 왜냐하면 매주 목요일 오후에 함께 <장자>를 읽기 때문이다. 어제도 참 좋은 구절을 만났다. 원어를 읽고 뜻을 풀어 본다. 그리고 느낀다. 어제는 책 읽기를 마치고, 낮 와인을 즐겼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친구와 와인을 마시며 장자의 소요유를 즐겼다. "연두"의 마음으로. 사진은 어제 점심 식사 후, 우리 동네 한 연구소에서 찍은 것이다,
연두/정희성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거리의 나무들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채워지며, 수채화가 유화가 될 것이다. 숲의 아래 쪽은 진녹색, 중간은 초록, 위 쪽은 아직 연두로 짙고 얕은 '녹색의 향연'은 좀 더 계속될 것이다. 봄이 꼭대기를 쫓아가며 농담(濃淡, 진함과 묽음)의 붓질을 해댈 것이다. 드문드문 섞인 솔숲이 암록(暗綠, 어두운 초록색)일만큼 신록이 눈부실 것이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색이 변화하며 형형색색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군자삼변(君子三變)"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수양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 모두가 되고 싶어하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엄숙함, 따뜻함 그리고 논리력을 모두 갖춘 사람을 '삼변(三變)'이라고 했다. 그런 세 가지 다른 변화의 모습을 그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군자'라 한다 했다.
(1) 일변(一變)은 멀리서 바라보면 의젖하고 엄숙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망지엄연(望之儼然)’이라 표현한다. ‘멀리서 바라보면(望), 엄숙함(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 풀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며 의젓하기는 하지만 가까이 하기엔 다소 어려운 면이 있을 수 있다.
(2) 이변(二變)은 엄숙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 대화해 보면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것을 '즉지야온(卽地也溫)'이라한다. '멀리서 보면 엄숙한 사람인데 가까이 다가서서(卽) 보면 따뜻함(溫)이 느껴지는 사람의 모습이라 풀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겉은 엄숙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속은 따뜻한 사람이다.
(3) 삼변(三變)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정확한 논리가 서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청기언야려(聽其言也厲)'. 그 사람이 하는 말(其言)을 들어 보면(聽) 논리적인 모습(厲)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자는 비록 달변은 아닐지 모르지만 했던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다.
이를 종합하면, 군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외면의 엄숙함과 내면의 따뜻함에 논리적인 언행까지 더해져, 멀리서 보면 의젓한 모습, 가까이 대하면 대할수록 느껴지는 따뜻한 인간미,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행을 하는 군자, 최상의 사람, 선비, 보살인 것이다. 그것이 한 사람의 품격이다. 요즈음 말로 해서 리더는 온화하되 절대로 유약해서는 안 된다. 주저하고 결단치 못하는 리더는 전제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는 리더이다.
어제 읽은 <장자>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어제 읽은 다음의 세 가지 이야기는 태자처럼 좀 모자라고 난폭한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할 일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우화, 즉 이야기의 힘이다.
(1)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의 무모함): 달려오는 수레를 향해 팔뚝을 휘두른 사마귀 이야기는 불의 하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 앞에서 우리 개인은 어쩔 수 없이 한 마리 사마귀에 불과하다는 슬픈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이상이 아무리 높고 갸륵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현실적 능력의 한계를 무시하고, 무모한 짓을 하다가 쓸데없이 희생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보다 더 어리석다는 말이다. 좀 더 사려를 깊이 살피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힘도 없으면서 겁 없이 대드는 행동을 뜻하는 '당랑지부(螳螂之斧)' "당비당차(螳臂當車)'도 여기서 나온 성어이다. "당랑거철"도 마찬가지이다.
(2) 호랑이 길들이는 이야기는, 성질이 사나운 사람도, 그 성질(본성)을 잘 알아 거기에 맞춰 가면서 이끌면 고분고분해지는데, 성질을 거스르면 살기(殺氣)를 드러내 덤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상대방의 성질을 맞추어 주되,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 등을 잘 알아 잘 구슬려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은 때를 알아야 하는 점이다. 성질에 맞춘다는 것이, 하는 짓을 무조건 방임하는 것은 아니다. 먹이를 통째로 주거나 산 채로 주지 않는 것도 사나운 성질을 방임하거나 조장하는 대신, 물의 흐름을 좇아 물을 다스리듯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요령이다. '무위(함이 없이 함)'이다.
(3) 말 등에 모기가 앉은 것을 보고 갑자기 말 등을 때렸다. 놀란 말(馬)이 재갈을 벗고 야단하는 바람에 말을 사랑하던 사람의 머리를 깨고 가슴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말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사소하고 엉뚱한 실수 하나로 자기의 의도와는 달리, 그 동안 해준 모든 것 일이 허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말에게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2와 3와 이야기는 특히 '시간 맞춤'이 중요함을 암시하고 있다. 호랑이 사육사는 시간을 맞춰(時) 먹이를 주고, 말을 사랑한 사람은 시간의 '못 맞춰(不時)' 말을 때렸다. 모든 일에 적기(適期)가 있음을 알고 맞추라는 것이다. 영어로 '타이밍(timing)', 그리스어로 카이로스(Kailos), '때'를 따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사람은 다 때가 있다. 그 때는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온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부분은 제4편 인간세(人間世,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이 편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일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개인적으로 훌륭하게,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진정 기여하면서 보람 있게 사는 길인지를 보여 부며, 삶의 지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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