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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협치는 사실상 ‘어떻게’의 영역에서 작동할 수 있다.

몇 일전에 나는 강준만 교수의 칼럼을 흥미롭게 읽고 여러 가지 통찰을 얻었다. 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과 ‘왜'는 가치와 비전의 영역이므로 협치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협치는 사실상 ‘어떻게’의 영역에서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부동산이나 일자리 등과 같은 민생 문제는 대부분 ‘어떻게’와 관련된 것이다." 정치는 '어떻게'를 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나 우리가 하는 어떤 일 앞에서는 '왜'를 먼저, 그리고 '어떻게'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 그 일('무엇')이 훨씬 즐겁기 때문이다. 그 이유와 방법을 아니까 말이다. ‘무엇’, ‘어떻게’ ‘왜’, 가운데 어떤 게 가장 중요한가를 놓고 많은 이들이 여러 말을 남겼다. 물론 정답은 없다. 사이먼 사이넥의 <나는 왜 이 일을 하느가>라는 책은 꿈꾸고, 사랑하고, 열렬히 행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라 한다. 저자에 의하면, 세상과 일터,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우리를 춤추게 하는 근원의 힘, 자신만의 '왜'를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왜’가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글쓰기와 관련된 조언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1970년대 이후 사회과학에서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어떻게’라는 물음만 남았다”고 개탄했는데, 진보적 사상가들은 대체적으로 ‘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임상심리학자 에른스트 푀펠은 “항상 모든 것에 ‘왜’라고 질문하는 이성에 대한 중독증은 그 자체로 질병이 아니라면 편협함의 신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회가 아닌 개인적 차원의 조언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강교수는 평소 현 정권이 ‘무엇’과 ‘왜’엔 강하거나 능하지만 ‘어떻게’엔 소홀하거나 무능하다고 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동안 전 정권들이 '왜'와 '무엇'을 너무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국가 비전이 우선 필요했던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현 정권은 '어떻게'가 부족하여 관료들에게 당했다. 강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행정은 ‘사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에 불과하다는 속설을 확인하면서 분노와 개탄을 쏟아내지 않았을까? 부동산 정책은 일단 ‘욕망에 불타는 시민’을 전제로 삼아야 했다. 물론 공기업 직원과 공무원도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전제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야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역효과’를 예방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이건 대단한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식 중의 상식이 아닌가. 그러나 ‘선의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문 정권엔 그런 상식이 없었다. 시민들에게 선의를 가지라고 해 보아야 소용없다. 다 욕망에 불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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