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원래 태어날 때 사람은 생각이 없다. 살아가면서 사회 체제나 구조 등에 의해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내 생각이 진짜 내가 한 생각인가, 그 생각이 진리에 가까운가를 잘 모른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하다'는 내 생각을 '의심하다' 아니 '회의하다'로 읽어야 한다. 고집스럽게 갖고 있는 내 생각을 부정해보아야 한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주관성이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 속에서 정답을 찾는 자연과학적 사유와는 달리 인문학적 사유는 정답이 없는 주관성이 개입된다. 예컨대, 사형제 폐지에 대한 생각의 경우 정답이 없다. 다만 이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고, 우리는 그 견해가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진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사유와 정교한 논거를 갖춘 내 생각을 가져야 내 삶을 주체적으로, 내 삶을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글쓰기와 토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안 되는 것은 일제 식민지 교육 문법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린 학교에서 주입식 암기 교육을 받았고, 그 방식은 아직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비뚤어지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 심사가 뒤틀렸으면, 있는 듯 없는 듯이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한다. 아니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확대하면서 자기 삶을 꾸리는 사람은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지적 '부지런함'이란 단독자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따라 하기'의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가 가능해지도록 '틈'을 벌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대답에만 빠지지 말고, 질문하는 사람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심도 있는 독서가 필요하다.
독서라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을 확장하고 싶다면, 다소 힘에 부치는 책을 선택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주장이다.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 던지고 싶은 책들을 마치 광부가 광맥을 찾아 곡괭이질을 하는 것처럼 파고들다 보면, 어느 순간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글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말했다. 작가의 그런 열정을 글 속에서 알아차리는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를 인용해 독서로 얻는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설프고 얄팍한 수용이 아니라, 전인간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나를 뭉클하게 하고, 활력을 느끼게 하고, 흥분시키는 것이니, 편리하게 차트화한 지식 정보를 넘겨주는 고요한 것이 아니에요.”
독서 행위는 수동적 정보의 수용이 아니라 작가와 더불어 적극적인 이해의 과정에 뛰어드는 일이다. 삶과 세계 혹은 인간에 대한 인식의 심화는 우리를 편협성의 늪으로부터 건져준다. 욕망의 바다를 는적거리며 헤매기보다는 인식의 광야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단련하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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