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3월 28일)
코로나-19로 우울했던 마음이 꽃들로 크게 위안을 받았는데, 어제부터 봄 비가 훼방을 놓는다. 계속되는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좋아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새롭게 발견한 동네에서 꽃 놀이를 하거나, 주말 농장에 가 흙 놀이를 했는데, 비가 방해 한다. 그래 이런 저런 글들을 많이 보며 수련하고 있다 . 그러던 중 <장자>의 '빈배' 이야기가 하나의 답을 주었다.
『장자』의 ‘산목’편에 ‘빈 배’ 이야기가 있다. 장자가 가파른 양안 사이로 흐르는 장강(長江)을 객선 타고 지나가는데 선장이 아주 살기등등한 흉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라 겁이 좀 났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비좁은 협곡에서 어떤 배 이물이 객선의 허리를 받은 것이다. 그 배 주인은 꼼짝 없이 죽었겠구나 하고 갑판에 나가보니 선장이 태연히 물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 사람이 도통을 했나 하고 주변을 바라보니 이 객선을 받은 배는 빈 배(虛舟)였다. 강안(江岸) 절벽에 묶여 있던 빈 배의 새끼 줄이 삭아 떨어져 마침 지나가는 객선을 들이받은 것이다. 이때 장자는 무릎을 친다. 깨달은 것이다. 저 배처럼 내 마음이 비었다면, 사람을 들이받아도 그 사람이 화를 낼 일이 없겠구나! 자기를 비우고 세상을 떠 노닌다면 그 누가 나를 해하리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감히 그를 해치겠습니까?"(人能虛己以遊世, 其孰能害之). 빈 배는 목적지가 없다. 우리 삶도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살아가는 그 자체이다. 삶이란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 없다. 그래야 자유롭다.
'나를 비우고 일상의 강을 흘러간다면, 아무도 나를 해칠 사람 없다. 그리고 일상이 여행 그 자체라면, 자유롭다.' 아침 묵상 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는 74세의 나이(1957)에 중국 정부의 초청 방문을 하고 돌아오다가 아시아 독감으로 독일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그런데 그의 시신은 크레타에 안치되었다. 미리 준비된 다음의 묘비명과 함께.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장자의 "빈 배론"과 다르지 않다. 나를 비운 빈 배처럼 살면, 자유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한 자유는 불가능하다. 불안과 공포가 나를 짓누를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에도 두려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충만한 상태, 그것이 곧 자유이다.
오늘 아침은 인문정신으로 꼭 찼던 고 정채봉 작가의 시를 공유한다. 아침 사진은 어제 비 오기 전에 주말농장을 다녀 오다 찍은 것이다. 자연은 망 없이 자기 할 일을 한다.
만남/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그렇다고 자유를 위해, 무조건 비우고,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나의 수고로 살아야 한다. 그 일상을 지배하기 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우선순위 가 있다. 이를 피하면, 자유는 없다. 자유, 그거 어렵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김수영) 안다. 우리는 생각하고 조사하고 실험할 자유 없이는, 진리는 물론이고 고통에서 벗어날 길도 찾을 수 없다. 고통은 진리가 아닌 거짓 권위로부터 올 때, 더 심하다. 인문운동가는 자유를 중시하며, 어떤 텍스트나 제도, 지도자에게 최고 권위를 부여해서 옳고 그름의 최종 심판으로 삼는 일을 하지 않는다.
(1) 잠과 같은 육체의 기본 욕구를 돌본다. 그러기 위해 하루의 흐름에 맞춰 해야 할 일들을 잘 실행해야 한다. 그것도 내 수고를 들여야 한다.
(2) 자신의 몸을 정성껏 대해야 한다. 충분한 운동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균형 잡힌 식생활을 해야 한다. 요즘에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도전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른바 '탈진(번-아웃) 증후군'에 빠져 위의 두 가지 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3) 위의 두 가지 조건을 잘 지켜 몸이 건강한 균형 상태에 놓이게 되면 비로소 기도, 곧 '영성 생활'을 충실히 해야 한다.
(4) 가족과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와 친구와의 관계 등 인간관계를 돌봐야 한다. '탈진 증후군'에 빠졌다는 것은 육체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사랑이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 <책으로 하는 한 달 피정 - 잠깐 멈추세요> (게르하르트 바우어 지음, 최용호 옮김, 가톨릭출판사>)
자유인과 노예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튀지 말고 나서지 말고 무리 속에 묻혀서 무난하게 지내도록 교육받고 있다. 이게 심하게 이야기 하면 노예적 삶이다. 이들은 자유인적 삶을 두려워 한다.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 도피"가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는 자유인을 위한 인문학적 소양보다는 노예적 삶을 위한 기술과 테크닉에 관심이 많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드물다. 알량한 인문적 지식을 습득하여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인터넷에 떠도는 "좋은 글"을 읽는다고 인문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을 통해 인문 정신을 배워야 한다. 다음은 언젠가 배철현 교수의 글을 읽고 적어 두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스 윤리학>에서 신체적인 건강이 정신적인 건강을 위한 필수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유베날리스)도 "Mens sana in corpire sane"라는 유명한 라틴어를 남겼다. '건강한 신체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다. 이들과는 달리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는 <명상록>에서 정신력이 육체의 힘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습관이 운명입니다'라는 말처럼, 생각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반복되면 환경이 되고, 환경이 굳어지면 운명이 된다. 인간은 그 사람이 자주하는 그것이며, 자주하는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현재의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의 결과이다. 즉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라고 말했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지만, 1차적으로는 신체적 억압이 제거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이유가 되어 하는 언행은 거침이 없다. 자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삶에서의 많은 문제들은 자신의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온다. 자기 인식이 우선이다. 자기 인식은 자신을 아려는 마음가짐이고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신을 항상 응시하려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사제나 목사에게 달려가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외부 권위에 의존하려 한다. 외부 권위는 명령하고 억압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일 때가 많다. 우라 사회는 우연히 부여잡은 권위를 가지고 휘두르며 다른 이에게 명령하며 복종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혁은 한 번도 이념, 정책, 교리, 리더의 카리스마를 통해 성취된 적은 없다.
자유를 위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두어,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한 관찰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과 관계에서, 그들이 반응하는 자신을 응시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스스로 수정하려는 수고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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