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7일)

몇 일 전부터 나는 <인문 일기>에서 노자가 꿈꾸는 성인, 내 방식대로 하면 '진정한 자유인'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일을 살펴 보고 있다.
① 無爲之事(무위지사)하고
② 不言之敎(불언지교)하고
③ 萬物作焉而不辭(만물작언이불사)하고
④ 生而不有(생이불유)하고
⑤ 爲而不恃(위이불시)하고
⑥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하고, 夫唯弗居(부유불거)하면, 是以弗去(시이불거)하다.
이를 한국어 말하면, 성인, 즉 자유인은 "①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②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한다. ③ 모든 일이 생겨나도 참견하지 아니하고, ④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는다. ⑤ 할 것 다 되게 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⑥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중에서 어제는 ③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 ④ 생이불유(生而不有)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마지막 ⑤ 위이불시(爲而不恃), ⑥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부유불거(夫唯弗居), 시이불거(是以弗去)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은 "할 것 다 되게 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爲而不恃(위이불시)"는 도(=성인_은 "만물이 잘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 되어가는 모습에 기대지 아니한다"는 거다. 여기서 "시(시)"는 '기댄다', '의지한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도덕경>>의 여러 장에서 되풀이된다. 제10장에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낳으면서도 나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한다. 제51장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리고 제77장에서는 "시이성인위이불시, 공성이불처, 기불욕현현(是以聖人委而不侍,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그러므로 성인은 만물이 자라도록 만들어가며 그 성취에 기대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서 처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슬기로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功成而不居(공성이불거)"는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는 거다. 자신이 공을 쌓고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해 놓고도 뽐내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무엇을 성취한다 할지라도 그 열매를 독차지하고, 그 성과를 따먹으면서, 그 성과 속에서 안주하는 삶의 태도를 근원적으로 벗어 내버리는 거다. 성인, 자유인은 자기 행동 때문에 누가 잘되거나 무슨 일이 이루어져도 자기의 공을 주장하거나 과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기의 의식적, 인위적 행위가 아니라, 도에 따라서 저절로 우러나온 자연적 행동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행동인지도 모르고, 그것 때문에 생긴 공이 자기 젓인지도 모른다. 이런 행동 방식, 이런 마음가짐, 이런 초월적 자세를 자진 자유인이 하는 일은 참된 일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是以不居, 시이불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유불거, 시이불거(夫唯弗居, 是以不去)"이다. "대저 오로지 공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사라지지 아니한다"는 거다. 세월은 원래 있던 환경을 지우고 전혀 다른 환경을 세워가며 질주해 나간다. 그 동작은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세월은 무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움직이는 세상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두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러므로 살면서, "성공이 이루어지면, 그 성공을 차고 앉지 말아야 한다"는 노자의 말 "공성이불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어떤 혁명가가 자신이 타도하려고 하는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그것은 이미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에 불과하다. 혁명가와 반항아는 다른다. 진정한 혁명가는 공을 이룬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으면 안 된다. 그 예가 체 게바라이다. 반항아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타도하고 난 후, 바로 그 자리를 차고 앉아 바로 정주형태의 집안을 이루어 버린다. 혁명이 성공한 그 순간을 차고 앉는다. 혁명의 깃발이 바로 완장으로 바뀐다. 혁명은 지속적으로 혁명 될 때에만 혁명이 된다. 이 말을 노자식으로 말하면, 공성이불거, 즉 공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지 말자는 것이다. 이를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 한다. 중심에 머물다가, 그만 파국을 맞는다. 삶은 동사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공(功)을 이룬 다음에 바로 다음 공(功)을 향해 나아 가는 동사적 태도 말이다.
"노자가 이런 방식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와 이상적 인간형은 어떤 본질적인 가치에 충실하여 남성적으로 경쟁에서 승리하여 굳건해 지는 모습이 아니라, 존재와 가치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한계 지워지지 않는 순수한 모습이다. 고정적인 지적 체계나 가치가 없으니 세계의 전체 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최진석) 오늘 공유하는 시인처럼 말이다.
옹기전에서/정희성
나는 왠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가 좀 빈 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 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있다
가끔 생각해 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실패한 것을 택하니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3월 9일 선거를 앞두고, 모두들 혼란스러워 한다. 나도 잘 모르겠다. 언젠가 적어 두었던 최진석 교수의 주장을 다시 공유한다. 거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공성이불거"하고, 우리는 다음 공(功)으로 건너가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의 목표는 건국이었다. 그 독립국가로서의 다음 목표는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산업화였다. 그 때의 산업화는 공업화와 도시화였다. 그 다음은 민주화였다. 사회를 주도하는 경제가 달라지면 주도하는 계급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새로운 정치적 조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민주화에 대한 욕구였다. 이젠 보이지 않는 '선진화의 벽'을 넘는 게 우리의 과제이다. 민주화 다음의 선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선진화는 문화적이고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의 시선이 주도권을 발휘하는 단계이다. 그런 차원에서 노자의 철학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사실 선진화의 단계는 어렵다. 왜냐하면 목표가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선진화의 벽은 투명하다. 지성적이고 문화적인 높이로만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진화로 나아가려면 썩은 틀들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 신념화된 자기 소리만 내면 안 된다. 예컨대, 이젠 노자의 '무위(無爲)'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을 이루었으면 그것을 차고 앉아 거기에 머루려 하지 마라"는 "공성이불거 태도가 요구된다. 영웅은 공을 이룬 다음에 바로 다음 공을 향해 나아가는 동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철학한다는 것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남긴 체계적 이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이론이 생산될 때 사용되었던 그 높이의 시선에 함께 서 보는 일"이라 했다. 단지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배우는 이유는 그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철학자들이 남긴 체계적 이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지성적 시선으로 사유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철학자들의 사유의 높이에 도달해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이다. 철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만난다. 그는 <<명상록 II, 2>>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신, 짧은 호흡 그리고 주도하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을 구성하는 세 요소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인간으로서 삶을 유지한다는 의미를 궁리했던 로마의 황제였다. 그는 이미 자신을 1인칭이자 3인칭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자신의 구성 요소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 가지로 정리한다.
• 육체를 지닌 존재
• 짧은 호흡
• 앞의 둘을 지배하는 영혼인 '헤게모니콘'
아우렐리우스이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단신이 지금 죽는다고 생각해 보라. 육체는 피, 뼈, 신경들의 연락망, 동맥, 정맥이다. 짦은 호흡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람이다, 고르지 못하고 항상 들락거린다. 이제 세 번째가 남았다. 바로 '주도하는 마음', 즉 '주도신'이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인간을 육체(사르키아 혹은 소마), 정신(프쉬케) 그리고 영혼(푸뉴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영혼으로 알려진 푸뉴마의 원래 의미는 호흡으로 생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신적인 기운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단어를 성령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달리 아우렐리우스는 인간구성에서 육체를 그대로 사용하고, 정신과 영혼을 하나로 묶어 '짧은 호흡(프뉴마티콘)'으로 합쳤다. 그런 후, 인간의 육체와 정신-영혼을 지배하는 새로운 마음을 '헤게모니콘', 즉 주도심이란 이름으로 살명하였다.
헤게모니콘 이야기를 좀 더 해본다.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는 '명령하고 주도하기에 알맞은'이란 뜻으로 소크라테스의 용어였다. 이 말은 군사용어이기도 했다. 이 말은 군대 사령관처럼,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헤게모니콘은 영혼의 일부로 오감의 지배를 받는 육체를 지배하는 인간만의 특별한 정신이다. 헤게모니콘은 자신의 몸과 정신 활동을 조정하는 중앙제어장치이다. 만일 주도심이 없다면, 인간은 육체를 자극하는 쾌락의 부하가 되고, 쾌락이 점점 커져 정신을 지배하여 이기심의 노예가 된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읽은 책들을 뛰어 넘어, 자신의 삶의 원칙을 헤게모니콘, 즉 주도심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발견하고 그것에 복종한다. 예를 들어 노예였다가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프로아이레시스'라 불렀다. 번역하자면, '의도적인 선택'이다.
아우렐이우스는 훌륭한 철학자나 그가 남긴 저서를 따르기보다, 자신이 스스로 삶을 주도할 수 있는지 살피라고 충고한다. 그에겐 자신이 흠모하는 '그 자신'이 있다. 나는 어떤 가? 내 삶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고 싶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자발성으로 사는 일이다. 그래야 즐겁고 행복하다. 즐거움이란 내 마음이 공감을 경험한 후에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의 공간 안에서 일으키는 진동이다. 독서를 통해서 지향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즐거움 거쳐서 자기가 재발견되고, 재발견된 자기가 쓰기로 확장 할 때 더 즐거움은 배가 된다. 그러면서 자기는 더 확장된다. 자기 스스로 운동, 즉 움직임을 화복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게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다. 배철현 교수의 <묵상>에서 배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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