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6일)

긴 연휴 기간동안, 2020년 <인문 일기>를 다시 읽으며 오, 탈 자를 수정하고, 비문을 찾아 고치고 있다. 이걸 월 단위로 묶어 카톨릭 교회에서 발행하는 <<매일 미사>>처럼 책을 발행하고 싶어서 이다. 문제는 받아 주려는 출판사가 없다. 출판을 도와 주실 분이 나왔으면 좋겠다. 책 제목은 <<나는 빗 속에서도 춤을 추었다>>로 정하고, "사진, 시와 함께하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를 부제로 하였다. 매월 책의 소제목은 이해인 수녀님의 시, <새해의 기도>에서 따올 생각이다. 다음과 같다.
• 1월: 해오름달,
• 2월: 시샘달,
• 3월: 물오름달,
• 4월: 잎새달,
• 5월: 푸른달,
• 6월: 누리달,
• 7월: 견우직녀달,
• 8월: 타오름달,
• 9월: 열매달,
• 10월: 하늘연달,
• 11월: 미틈달,
• 12월: 매듭달
오늘 아침은 2020년 2월 <인문 일기> 수정을 마쳤다. 그러니까 2월의 소제목은 "시샘달"이다. 이 <인문 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지난 2018년부터 대학에서의 인문학 강의를 떠나면서, 인문학자가 아니라, 나를 인문 운동가로 규정하면서부터 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 사회는 지금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천박한 물신주의와 인간의 가치를 인격이 아닌 기능에서 찾으려 하는 비인간화라는 시대적 질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의 약은 '인문정신', 즉 인문적 가치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되살리는 것이다. 그 역할이 인문운동가라 보았다. 인문학자와 인문운동가는 다르다. 인문학자가 과학자라면, 인문운동가는 공학이고 기술이다. 인문학이 이론이라면, 인문정신은 일상에서 구현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면 인문학자이고, 사랑이라는 말이 생활에서 구현되어 친절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문운동가이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자각, 아니 사람됨의 깨달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대 경쟁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작동 기제가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이다. 올림픽에서 외치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를 찾거나, 더 높은 성공의 열차에 타려고 발버둥친다. 과학 기술도 기하급수적인 속도 빨라지고 있다. 기업들은 더 먼 데까지 새 물건을 갖고 달려가기 위해 경쟁한다.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올림픽 정신과 그 반대에 있다.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다가려 하는 노력이다. 그러니까 인문정신은 소외된 자리를 향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낮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고, 느긋하게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일이고, 세계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친화력이다. 이런 인문정신이 사회에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선진 사회가 된다. 그러니까 선진사회는 선진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선진문화는 인문정신이 밑에 배어 있어야 한다. 산업화니 민주화는 선진사회를 위한 전제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다시 한 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 정신은,
• 소외된 자리를 향하고 낮은 곳을 바라보는 연민(憐憫)의 마음,
• 느긋하게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여유(餘裕)의 마음,
• 세계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공감(共感)의 마음이다.
인문운동가의 시선은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구레함 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결정하고 지배할 더 높은 위치에서의 결정을 시도할 수 있는 높이이다. 그런 시선은 '천박하게 놀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인문 운동가가 보는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로 인간의 동선이다. 인문적 활동이란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상이나 창의는 인문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인문적 시야를 가지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켜야 한다. 그건 전략적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하는 일이다. 시선의 높이는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이다.
이런 생각은 <<장자>>와 <노자>>를 읽으면서 나의 인문적 시선이 높아졌다. 특히 <<장자>>는 거의 전부가 이야기나 우화로 꾸려져 있어 읽는 이가 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게 필요한 깨우침을 얻도록 되어 있다. 무엇을 가르치기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속적인 고정 관념, 이분법적 사고방식, 거기에 기초한 인습적 세계관이나 종교관의 내적 모순을 우리 스스로 살펴보고 스스로 타파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줄 뿐이다. 우리의 얼굴을 씻겨 주고 단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거울을 들어 주는 셈이다. 그 장자적인 글쓰기가 인문 운동가의 역할이다. 똑같이 거울을 들어 주는 일이다.
거울에 방점을 찍었더니, 이우걸 시인의 <이름>이란 시가 생각났다. <<장자>> 제7편 "응제왕", 그러니까 내편의 마지막에 마음을 거울처럼 하라고 한다. 장자는 지인(至人) - 노자가 말하는 성인(聖人), 내가 말하는 자유인 - 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다. 이우걸 시인은 이름이 거울이라 한다. 장자가 말하는 흥미로운 "거울 같은 마음"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이름/이우걸
자주 먼지 털고 소중히 닦아서
가슴에 달고 있다가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
어머닌 눈감으시며 그렇게 당부하셨다
가끔 이름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한다
먼지 묻은 이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 내 이름을 써 보곤 한다
티끌처럼 가벼운 한 생을 상징하는
상처 많은, 때묻은, 이름의 비애여
천지에
너는 걸려서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이우걸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인문운동가 #인문정신 #장자_거울
<<장자>>의 제7편은 리더의 자격과,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이야기 한다. 내편 마지막인, "혼돈에 일곱 구멍"이라는 "혼돈칠규(混沌七竅)" 이야기 직전에 "거울" 이야기가 나온다. 그 원문과 번역을 공유한다.
無為名尸(무위명시), 無為謀府(무위모부), 無為事任(무위사임), 無為知主(무위지주)。
體盡無窮(체진무궁), 而遊無朕(이유무짐), 盡其所受於天(진기소수어천), 而無見得(이무견득), 亦虛而已(역허이이)。
至人之用心若鏡(지인지용심약경), 不將不迎(부장불영), 應而不藏(응이부장), 故能勝物而不傷(고능승물이불상)。
이름에 메이지 말고, 꾀의 창고 되지 말고, 쓸데 없는 일 떠맡지 말고, 앎이 주인이 되지 마시요.
무궁한 도를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에 놀고, 하늘에서 받은 바를 완전히 하고, 터득한 것을 드러내려 하지 마시요.
지인의 마음 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대로 응할 뿐 갈무리해 주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기고 상함을 받지 않는다.
리더에게 필요한 마음가짐들이다. 그냥 누구에게나 필요한 용심(用心, 마음 씀)의 구체적인 기술이 아닐까? 나열해 본다.
① 너무 이름이나 지위에 매이지 말라는 거다. 그러니까 명함을 크게 박아 가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거나 자기 광고에 골몰하지 말라는 거다.
② 잔꾀(잔머리)의 창고가 되지 말라. 모략과 지략, 음모를 꾀하면서 나라나 조직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거다.
③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라. 이것저것 감투 쓰지 말고 공적 위주로 무슨 프로젝트다 이벤트다 떠벌리지 말라는 거다. 무위의 위(無爲의 爲, 함이 없음의 함)을 염두에 두라는 거다.
④ '앎의 주인'이 되지 말라. 잔꾀나 지모의 주인이 돼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⑤ 위에서 말한 4 가지 부정적인 방법을 버리고, 무궁한 도, 사물의 근본을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 비움의 경지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고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을 하라는 거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거울처럼 하는 거란 말이다. 거울은 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비출 뿐, 밉다고 쫓아 보내고, 예쁘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하지 않는다. 앞에 나타난 것이 슬프다고 함께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을 비췄다고 제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잔잔히 떠오르는 대로 비추는 거울, 이것이 자유인의 고요하고 잔잔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 쓰기를 거울과 같이 하라는 거다. 거울은 절대 먼저 웃지 않는다.
<<장자>>에 "감어지수(鑑於止水)"라는 말이 있다. '흐르지 않고 고요한 물에 사람들은 거울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본다'는 말이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춰 볼 수 없는 것처럼 고요함이 없는 마음에 우리의 모습은 비쳐지지 않는다. 오늘 시에서는 이름이 자신의 거울이라 한다.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누구나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지닌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다른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한 사회 속에서만 살았던 사람은 자기를 비우어 볼 거울이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그동안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우칠 기회가 없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사는 사회는 일상이 영위되는 공간, 존재가 귀속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성숙한 사람들은 그래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을 낯설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민 낯을 그대로 비춰주고,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낯설게 보여주는, 그런 '불편한 거울'이 있으면 나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존경하려면,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일상을 통제하고 지배하여야 한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 남들을 통해 여과된 나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를 쓰면 자신에 대한 존경이 안 생긴다. 나는 온 데 간 데 없고,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가 부여한 명칭과 숫자로 전락한다. 명함에 매달린다. 어려서는 부모가, 학교에서는 입시선생과 학력고사 점수가, 사회에서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나에게 요구한 숫자가 '내'가 된다. 내가 그런 나를 관찰하고 평가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남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다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럼에도 불구하고/켄트 M. 케이스(Kent M. Keith)-류시화 역 (0) | 2022.02.08 |
|---|---|
|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 (0) | 2022.02.07 |
| 마리안, 마가렛/강신애 (0) | 2022.02.07 |
|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장석주 (0) | 2022.02.07 |
| 희망가/문병라니 (0) | 2022.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