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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코로나-19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세 가지 키워드

188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30일)

 

음력 설 명절 연휴의 이틀째이다. 그런데 코로나-19의 역병이 더욱 더 기승을 부린다. 나는 세 번의 백신을 맞고 배짱이 생겨서 인지, 아니면 동네를 가급적 벗어나지 않아서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데, 언론은 오늘 신규 확진 자가 1만7000명대를 기록할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것은 2020년 1월20일이었다. 미국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역사가 이제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나눠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프리드먼 어법을 따르면, 지금 우리나라는 ‘AC 3년’의 현재사가 진행되고 있는 거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코로나-19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를 했다. (1) 축소와 귀환의 시대 (2) 고립과 단절의 시대 (3) 욕망과 국가의 시대.

축소와 귀환의 시대는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이 축소됐고, 개인과 가족으로 귀환했다는 말이다. 이는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20일 방영된 한국방송공사(KBS) 특집방송의 조사 보도에 따르면, 54.4%의 응답자들은 지인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했다. 더하여 응답자의 41.7%가 ‘기운이 없고 무기력하며’, 30.5%는 ‘의심이 많아지고 사람들을 경계하게 됐다’고 답변했다. 여기서 김교수는 주목해야 할 것으로 "감정의 인과적 연쇄"를 지적했다. 다시 말해, 코로나-19로 촉발된 불안은 불신으로, 불신은 다시 고립으로 확장되어 갔다는 거다. 불안→불신→고립으로 인과적 연쇄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불안과 불신과 고립의 상태에서 공존과 통합과 연대라는 계몽의 서사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거다. 사회적 관계는 느슨해 지거나 끊어지고, 나와 가족의 욕망은 극대화되고, 삶의 장기적이고 의미 있는 기획은 무력화되고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우리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보고, 그 문제를 잘 아는 것이 희망을 찾는 첫 번째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고립과 단절의 시대라는 말은 ‘고립의 시대’는 ‘단절의 시대’와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사회적 고립은 단절을 낳고, 단절은 사회라는 공동체를 다층적으로 분화시킨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념·계급·세대라는 오래된 균열에 젠더라는 새로운 균열이 복합적으로 결합돼, 우리 사회는 구심력이 아닌 원심력에 의해 지배받기 시작했다. 한때 환대라는 미덕이 칭송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타자에 대한 무시와 혐오와 증오의 감정은 증폭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세 번째로 ‘욕망과 국가의 시대’가 되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욕망의 민 낯을 감출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욕망의 일차적 대상은 더 많은 화폐로 나타났다. 구조화되는 불안과 불신 아래 자신과 가족을 지켜줄 수 있는 건 돈과 부동산뿐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던 거다.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물질문명에의 욕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신문명이 서서히 망각되는 옛 연인의 희미한 이름처럼 쇠락해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문 운동가의 역할이 코로나 이후에 더욱 더 커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 욕망의 시대는 ‘국가의 시대’와 짝을 이룬다는 점이다. 점점 파편화돼 가는 사회 속에서 화폐와 함께 우리 인류의 삶을 지켜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체는 국가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거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국가는 무한경쟁 규칙의 보증인이자 생명과 안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의 위상을 제고하는 과정에서, ‘스트롱 맨’이 각광받고, 새로운 권위주의가 헤게모니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민주주의가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위기에 처하고 있다 점이다.

김호기 교수가 그리고 나도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축소와 귀환, 고립과 단절, 국가주의와 화폐지상주의 시대라는 코로나-19의 그늘 아래 우리  사회가 위태롭게 서 있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일궈내려면 객관적이고 냉정한 현실 분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도, 김 교수처럼, 아직 공존과 통합과 연대라는 계몽과 희망의 서사가 유효할 뿐더러 지금이야 말로 그 서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성부 시인의 <신년 기원>을 공유하고, 코로나-19같은 역병이 사라지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특히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통합, 연대 그리고 공존의 새로운 한반도 시대가 시작되길 비손 한다. 그리고 오늘 사진 속에서 나는 희망을 읽는다.



신년 기원 /이성부  

시인들이 노래했던 
그 어느 아름다운 새해보다도 
올해는 
움츠린 사람들의 한 해가 
더욱 아름답도록 하소서  

차지한 자의 영화와 
그 모든 빛나는 사람들의 메시지보다도 
올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소망이 
더욱 열매 맺도록 하소서  

세계의 모든 강력한 사람들보다도 
쇠붙이보다도 
올해는 
바위틈에 솟는 풀 한 포기, 
나목을 흔드는 바람 한 점, 
새 한 마리, 
억울하게 사라져가는 한 사람, 
또 한 사람, 
이런 하잘것없는 얼굴들에게 
터져 넘치는 힘을 갖추도록 하소서  

죽음을 태어남으로, 
속박을 해방으로, 
단절을 가슴 뜨거운 만남으로 
고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모든 우리들의 한 해가 되도록 하소서 
역사 속에 그리움 속에 
한 점 진하디 진한 언어를 찍는 
한 해가 되도록 하소서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지난 1월 27일 이후 멈추었던,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도 다 못한 제10장 "고통에 대해서 듣고 싶나"를 읽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해 본다. 특히 '인간은 지우개 달린 연필'이라는 이야기를  공유한다.

스승 이어령은 동서양의 꿈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한다. 동양 사람들에게 꿈은 깨야 하는 것이고 이룰 수 없는 헛된 것이고 악몽이라 하는 반면, 서양은 드림이라는 말로 달콤하다는 거다. 그들의 꿈은 목마름의 꿈이고, 그 꿈은 계속 이루어진다는 거다. 그들의 세계는 전부 꿈이 이끈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거다. 스승 이어령이 자주 꾸는 꿈은 신발을 잃어 버리는 꿈을 꾼다고 한다. 사실 신발은 자연과 나를 분리시키면서 연결해 주는 거다. 신발을 뺏겼다는 것은 상실하는 거다. 

신발은 인간 존재 자체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을 한 장의 종이에다 기록하고 이것을 이력서(履歷書)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이력서라는 말의 한문을 풀어보면, ‘신발(履)’를 끌고 온 역사(歷)의 기록(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고무신 거꾸로 신기'라는 말은 사랑하는 상대가 변심한 경우에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운 사람의 신발 끄는 소리(예리성 曳履聲)가 들리면, 버선발로 뛰어나간다.” ‘신발을 신을 틈이 없이 달려 나가야만, 아니 자신의 온 존재를 벗어 놓은 채 달려 나가야만 완전하게 그리운 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은 강가에 신발을 벗어 놓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든다. 왜 그럴까? 신발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신발의 고무 밑창 하나가 우리와 대지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대지는 인간이 장차 돌아가야 할 곳이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는 사람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다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일상에 매몰되어 살다 보면 내 삶을 살 수 없다. 그래서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은 신표(信標)가 된다. 우리말에 ‘부절(符節)’이라는 것이 있다. 옛날의 사신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돌이나 대나무 같은 것으로 만든 일종의 신분증 같은 것이다. 사신들이 가지고 다니던 부절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 반으로 나눈 반쪽이었다. 나머지 반쪽은 임금이 보관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반쪽 부절을 딱 맞추어 딱 맞을 경우를 ‘부합(符合)’이라고 했다. 지금도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부합하다"라고 말한다. 부합이란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서로 맞춘 부절이 딱 맞듯이 두 가지 사물이 서로 꼭 들어 맞음’을 뜻한다. 영어로는 ‘인덴추어(indenture)’로, ‘두 통으로 만들어서 서명한 계약서‘라는 뜻이고, 이 ’부절‘을 뜻하는 말이 그리스 원어에는 ’쉼블론(symbolon)‘으로 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그네가 한 집에서 오래 머물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주인과 헤어질 경우, 접시나 은화 같은 것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한 쪽은 주인에게 주어 간직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뒷날 주인 혹은 주인의 자손이 나그네 혹은 나그네의 자손을 찾아올 경우, 조각을 맞추어 보고 은혜 갚음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이 반쪽이 바로 ‘쉼볼론’이다. 반쪽이 '쉼볼론'을 ‘서로 맞추어 보는 일’은 ‘쉼발레인’이라는 동사로 불렀다. ‘상징’을 뜻하는 영어 단어 ‘심벌(symbol)’은 이 ‘쉼발레인’에서 온 말이다. ‘서로 맞추어보다’라는 뜻이다.

‘깨진 거울’이라는 뜻을 지닌 ‘파경(破鏡)’과 아주 비슷한 말이다. 옛날에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질 때 한 쪽씩 나누어 갖기 위해 거울을 깨뜨린 다음 이를 나누어 신표(信標)로 삼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맞추어 보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안 되면 후손들에게라도 서로 맞추어 보게 하기 위해 거울을 두 쪽으로 가르는 ‘파경’을 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이 파경이 ‘이혼’을 뜻하는 말로 잘 못 쓰이고 있다. 깨진 거울처럼, 신발 한 짝은 신표이다. 신발을 한 짝만 신은 사람을 '모노 산달로스'라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외짝 신 사나이는 두 명이다. 이아손과 테세우스이다.

신발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멀리 왔다. 스승 이어령은 "인간은 어쩌면 지우개 달린 연필"이라고 했다. 연필은 기억하고 남기기 위해 있고, 지우개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있다. 그러니까 인생은 지우는 기능과 쓰는 기능이 한 몸뚱이에 있는 거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속에는 비참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망각과 추억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좀 빨리 책을 읽었다. 그런데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있다. "죽음이라는 건 없어지라고 있는 거다. 사라져버리는 게 최고"이다는 말이다. 나도 세상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날 생각이다. 그리고 스승은 '눈물 한 방울' 이야기를 했다. 이 시대는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는 거다. 왜냐하면 피와 땀을 붙여주는 게 눈물이기 때문이다. 피와 땀이 어울려야 천 리를 달리는 한혈마(汗血馬)라는 명마(名馬)가 나오는 거라 한다. '눈물 한 방울'은 디지로그나 생명자본과 궁극적으로 같은 말이라 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프랑스 혁명을 예로 들어 주니, 알 것 같다. 프랑스인들은 자유와 평등의 기치를 걸고 혁명을 일으켰다. 그럴듯한 가치가 공포정치로 엉망진창이 됐을 때, 박애가 나와서 혁명의 역사를 바꾸었다. 자유와 평등은 끝 모르게 싸우지만, 그 사이에 박애가 들어서면 눈물 있는 자유, 눈물 있는 평등이 나오는 거기 때문이다.

우리 말에 '눈물 한 방울'에는 '방울'이 들어가 있다. 소리가 들어가 있는 거다. 사실 눈물은 소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눈물에는 줄줄 흐르는 눈물이 있고, 방울지는 눈물이 있는 거다. '눈물 한 방울'은 구슬이 되고 수정이 되고, 진주가 되는 거다. 방울이 되면 음향이 되고 종소리가 된다.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시다가, 스승은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준다'고 했다. 짐승과 사람을 구별하는 게 눈물이라는 거다. 특히 정서적 눈물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다 한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한다는 거다.

이런 이야기가 철 지난 이야기로 들리는 시대를 우리는 지나고 있다. 책이 페이스북을 못 이기고, 철학이 블로그를 못이기고 클래식 음악이 트로트를 못 이기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의 힘이 바다처럼 드넓으나 아날로그에서 방울지는 지혜자의 눈물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김지수 기자의 말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고, 내일 스승이 말하는 영성 이야기로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