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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참 무서운 세상이다.
7년 전 오늘 아침 글이 sns에 살아있다.

어제는 모처럼 비상업적인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것도 한가한 금요일 오후에, 그러나 극장 밖의 날씨는 좀 이른 겨울 추위였습니다.

강원도 횡성의 편안한 장소가 처음엔 편안하게 해주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죽음에 대해.
이 영화는 약 5년간의 사건을 모아서 약 2시간으로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우선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싫은 내색이 없고 무조건 옳고 무조건 져주고 할머니를 따릅니다. 사랑이지요. 그리고 할머니의 부지런함, 지혜가 사랑을 오래가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부분은 따뜻했지만, 죽음의 문제가 나를 짓눌렀습니다.

영화제목은 작자 미상의 고대가요, <공무도하가>의 한 구절에서 따왔군요. ‘공무도하(公無渡河)’, 임이여 강을 건너지 마오. 이 때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말할 수도 있지요.

죽음을 생각하니, 젊은 철학자 강신주가 말한 죽음의 세 종류가 생각났고,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자살, 니어링의 죽음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이 머리를 스치었습니다. 그리고 내 아내의 죽음 그리고 박찬국 교수의 <<초인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며 니체의 죽음관도 그리고 ‘모멘토 모리’라는 말도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제가 늘 외우고 다니는 제 삶의 세 가지 말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두 개는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와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입니다.

강신주는 죽음의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접근합니다. 1인칭 죽음으로, 즉 나의 죽음이지요. 2인칭 죽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너’의 죽음입니다. 3인칭 죽음은 나와 별 관계가 없는 그 또는 그녀 아니면 그들의 죽음이지요. 여기서 1인칭 죽음, 즉 나의 죽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죽으면 고통이 없으니까, 아니 죽은 후에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놓아 힘들게 하지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 아니 사랑하는 것이나 일이 있으면, 우리는 쉽게 자살하지 못하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나를 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자연의 흐름에서 인간은 죽어야 하고, 죽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성이 뛰어나거나, 성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3인칭의 죽음에서는 어떤 느낌이 없지요.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3인칭이라면, 슬픈 것입니다. 이 문제는 또 다른 사유의 주제이니 여기서 멈추고, 그동안 일기장에 모아 두었던 죽음에 관한 글들을 나열해 봅니다. 좀 길지만, 시간나면 읽으면서 오늘도 더 열심히 죽기 전에 후회 없이 삽시다.
제일 먼저, 가수 신해철의 죽음을 생각하며 쓴 한 칼럼부터 소개합니다. 이 글이 내가 죽음에 관한 장문의 글을 쓰게 한 것입니다. 물론 영화가 가장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 이런 생각들을 했었습니다.

# 최근 발간된 <<초인수업>>(박찬국)을 보면, 니체는 ‘더 이상 긍지를 갖고 살 수 없을 때 당당하게 죽는 것’을 강조했다. ‘삶에 대한 총결산이 가능한 죽음’을 권했던 것이다. 자살 미화라기보다 존엄한 삶에 대한 열렬한 찬양이다. 니체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웰 다잉’을 고민한다면,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할 만큼 정신력이 고양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철학에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사유를 집요하게 밀고 나갈 지식 생산 시스템마저 위태롭다. 프랑스에서는 자크 데리다 등이 만든 ‘국제철학학교’가 정부 지원금 중단 때문에 폐지 위기에 놓여 세계 인문학계가 떠들썩하다. 국내에서도 대학들이 돈을 좇아 철학과를 비롯한 인문계열 학과를 통폐합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삶과 죽음, 세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진작할 지식인들이 대학 안에서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재앙이다. 속세에서 모두가 외면하고픈 죽음을 성찰할 기회는 더더욱 없다. 웰 다잉은 엄격한 철학적 고민을 거쳐 존엄한 죽음으로 나아가는 행위여야 하지만 사보험시장 속의 상품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기개에 찬 논객이자 삶과 죽음을 고민하는 가사로 울림을 주었던 가수 신해철씨는 평소 생을 끝내는 준비가 되었을 때 기꺼이 떠나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의료사고든 아니든 그의 사인에 대한 논란 자체가 삶부터 죽음까지 인간을 강하게 결박하는 의료화·시장화에 대한 폭로다. 그는 “인격도 신분도 품위도 지식도 이젠 돈만이 결정하고 말해주는 거니…”라고 비판적으로 노래한 바 있다. 반면 이런 가사도 썼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 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우리 모두 언젠가는 궁극의 질문을 받게 된다. 하지만 세속의 질문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이유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 니체의 말입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그래서 죽음은 나를 성숙시키는 최고의 기회이다.’ ‘죽음에 대한 확실한 전망에 의해서 모든 삶은 맛있고 향기로우며 경쾌한 것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 끝까지 죽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니체가 말하는 ‘품위 있는 자살’이란 더 이상 긍지를 갖고 살 수 없을 때 당당하게 죽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죽음이다. 니체의 주장은 생존에의 충동을 넘어서 자신을 고양시키고 강화시키고 싶은 충동, 즉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의지는 저항을 극복해감과 함께 고양된다는 것이다. 니체를 읽다보면 만나는 ‘성숙시켜온 정신력’이라는 말이 좋다. 죽음 앞에서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바친 젊음과 정력은 비록 무엇이 되진 못했지만 성숙된 정신력이다. 이것은 내가 어려운 일을 닥치면 그 실력이 나올 것이다. 니체는 연민을 비판한다. 연민은 인간을 성장시키기보다는 연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거리의 파토스(pathos)에 의해서 발전한다.”(니체) 거리의 파토스란 기존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탁월한 인간이 됨으로써 기존의 자신이나 저열한 다른 인간들로부터의 거리를 넓히려는 열망이다. 이 열망이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연민은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를 제거한다. 니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연하게가 아니라 또는 민폐를 끼치면서 죽음이 찾아 올 대까지가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인터넷의 한 블로그에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들뢰즈의 죽음, 그리고 니어링의 죽음

들뢰즈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왕성하게 저술 활동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던 것이죠. 어느 저자가 쓰기를 깨끗하게 자신이 죽기를 원했기에 그러한 선택을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미 자기가 지니고 있는 바,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보여주었기에 그러한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죠. 니어링도 마찬가지입니다. 백 살이 되자 그는 스스로 모든 음식을 끊고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죠. 더 이상 산다는 것이 어떤 내용을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되기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그가 원했던 장소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들뢰즈와 니어링은 모두 무신론자입니다. 천국으로 언급되는 저 세상을 바라지 않고서도 그들은 영원을 보았기에 가능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에게 그들은 삶의 무한을 본 것이 아니라 신을 넘어서서 삶의 영원을 바라보는 자신의 안목을 지녔기 때문이죠.

러셀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위에 언급된 죽음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는 천국에서의 환대와 행복을 꿈꾸며 과장스럽고 과시적으로 죽어갔다는 것이죠. 즉 그의 죽음은 보상과 과시라는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치졸한 행태를 동반한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하여 보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과장된 귀족의 풍모를 잃지 않기 위한 고귀성에 기반하고 있다고요.

# 이것도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찾았던 내용입니다. 들뢰즈의 ‘죽음’으로부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소환한다. 들뢰즈는 죽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욕망의 강도=0’이라고.

억압이 아닌 열림, 부정이 아닌 긍정, 결과가 아닌 과정, 목적이 아닌 경험, 이 일련의 느낌은 단지 가볍고 경쾌하지만은 않지만, 그렇다고 무겁고 경건한 철학은 아니다. 그래서 인지 들뢰즈에게서 이제 나는 밝은 에너지의 기운을 느껴가고 있다. 이번에 읽은 텍스트엔 ‘알렝비탈’의 철학자 베르그송이 등장했다. 스피노자와 니체에 이어 베르그송이라, 그 철학자들의 사유를 가로지르는 긍정의 철학을 들뢰즈에게서 본다. 이 거인 같은 선배들의 영향들 중에서도 본인은 베르그송주의자를 자처했다고 하니,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생명에 대한 들뢰즈의 사유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생의 도약 등에서 보았던 것들과 겹쳐진다. 들뢰즈는 생을 긍정한다.

그런 그가 선택한 죽음은 자살이었다. 죽음의 한 방법으로서의 자살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들뢰즈는 어떤 생각을 펼쳐보였던가. 흔히 사람들은 생명과 죽음을 아주 먼 대척점에 놓는다.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 비상과 추락같이 정반대에 위치하는 서로가 서로를 극하는 상태로서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가진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창조에서 비롯하여 종말로 끝나는 서구 유럽문명의 세계관과도 일치한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생명은 죽음을 외면하는 상태, 죽음은 생을 외면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죽음을 ‘욕망의 강도=0’으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욕망의 강도=100’은 도약하는 생명이리라. 구체적인 한 인간의 삶에 초점 맞추지 않고 멀리 그리고 높게 물러나 조감한다면, 사실 죽음이란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명의 전단계일테다. 모든 소멸하는 것들이 있어서 그 빈자리를 내어주어야 새로운 생명이 움터 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앵글에서 바라본 죽음이란 유기체의 변화하는 양태의 한 지점일 뿐이다.

죽음은 기관 없는 신체가 접속을 멈출 때 찾아온다. 다양한 접속을 통한 존재의 변이를 통해서 새로운 양태를 만들어나가며 쉬지 않고 움직이던 실체가 드디어 멈추어 버리는 지점이다. 반복해 말하지만 욕망의 강도가 0인 생명의 상태가 죽음이다. 생명이라는 선과 죽음이라는 악이 중심에 놓이는 일반의 생각을 무찌르고 마는 들뢰즈의 사유는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죽음을 거부하고 만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부에서 비롯하는 창조적인 변용으로서의 생명의 한 모습, 생명의 스타일의 선택이 자살일 테니 말이다.

세속에 사는 우리들은 여전히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고 윽박지르면서. 엘랑 비탈, 약동하는 생명에게 경계의 메시지를 보낸다. 죽음으로 삶을 위협하는 그 방법이, 삶을 경건히, 열심히 살 수 있게 한다고 변함없이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욕망의 강도가 0에 이르렀다고 느꼈을 때 생을 향해 가볍게 딸칵 0ff를 누를 수 있었던 들뢰즈의 인생은 어떤 것이었는지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