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나에게 무력감이 밀려 오면 나는 이 문장을 기억한다. "산다는 것은 '비틀기'이고, 삶은 '꼬임'이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시도들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율동이다. 우리는 우주가 완벽한 원운동을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이 원운동을 하지 않고 타원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원은 기하학적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조작된 진실일 뿐이다. 진실은 완벽한 원이 아니라, 타원이다. 완벽한 원에는 에너지가 없지만, 타원에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평면적이고, 정지된 지성에게 힘이 포착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일상이 무기력해지면, '비틀어' 보아야 한다.
어떤 존재에나 힘이 작용하면 절대 균형이 깨지고 뒤틀림이 가미된다. 타원이 그렇다. 균형을 깨는 탄성*이 바로 힘이다. 동물들이 먹잇 감이 발견되면, 즉시 몸을 비틀어 자신의 절대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탄성을 준비한다. 여기서 힘이 나온다. 그 탄성이 적중(的中)이라는 최종적인 완성을 보장할 것이다. 적중은 몸을 비틀어 꼬임의 상태로 스스로를 몰고 가서 '동작'으로 생산되어야 만날 수 있는 최종 경지이다. 여기서 자신을 비틀어 꼬이게 하는 움직임은 불균형이고 동작이고 힘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이유는 생존이다. 인간 활동 핵심 동인은 생존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생존을 도모하는 최초의 활동을 우리는 분류로부터 시작한다. 효율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분류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구분에 지속성을 부여하여 전승하기도 한다. 이 구분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통제하는 능력을 축적한다. 이를 우리는 '지적활동'이라고 한다. 지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통제하는 일관된 형식이다. 인간의 성숙도 지적인 능력의 개발과 연관된다.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생존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적인 사람들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있다. 은유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사람이다. 지적인 활동 자체를 확장하여 분류의 틈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훌쩍훌쩍 건너뛰는 것이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연결하여, 틈을 벌려주며 소통시켜 버린다. 인간에게 의미의 확장은 통제 영역의 확장이다. 은유를 통해 세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지력이고 인간만이 가능하다. 네루다는 이를 '메타포라고 말한다. 그 메타포, 은유는 비틀기이다. 은유는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둘이 꼬인 것이다. 우린 이렇게 꼬여가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이 세계는 힘이 작동하는 비틀기로 꼬여 있다"고 노자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겠다. 음과 양으로. 전혀 관계 없었던 무엇과 꼬이고 또 꼬이며 영토를 확장하고, 또 확장해 나갈 때, 우린 힘을 얻고, 힘찬 모습이 된다. 이를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도 한다. 최진석 교수에게서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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