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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욕망이란 게 완전히 없어지면 죽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욕망은 natural unfolding, 즉 풀이라든가 나무가 아주 열악한 환경 속에서라도 비뚤어져서라도 태양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 욕망이라기보다는 생명력에 순응하는 것이다. 욕망이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이것은 주어진 생명을 가장 자연스럽게 발현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정지할 수 없다. 우리 속에 주어진 어떤 생명력, 이걸 잘 극대화하는 것,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인간 속에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맹자의 4단-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기본적인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그걸 극대화하면 우리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 그것을 누르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에 내재된 4단의 욕심을 눌러 버리면 성인으로 갈 길을 처음부터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생명력, 자연적인 가능성, 이것을 발현시키는 것은 욕망이 아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종교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토인비)이다.

토인비는 역사의 발전을 봐서 사라지는 문명과 살아남는 문명의 차이는 자기중심주의를 극복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 종교이다. 생명력의 발현과 욕망과는 다르다. 욕구와 욕망은 다르다. need와 want의 차이다. 욕구는 기본적인 삶의 drive이다.

심재를 하고, 오상아를 하고, 좌망을 한 현실적인 정치 지도자는 없다. 그러나 그런 지도가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우리가 그런 것을 모르고 살 때하고 다르지 않을까?

장자의 진인은 산에 가서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비주의란 심층종교이다. 신비주의가 점치는 것이 아니다. 심층에 들어가면 어느 종교도 통하는 면이 있다. 심층적인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든 안하든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심층주의자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지고 좋아질 수 있다.

종교란 우물 속에 있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탁 튀어나온 한 가지 사건만이 아니라, 개구리가 산을 올라가는 것과도 비슷하다. 산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더 많은 것을 보면서 더 많이 감동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는 것, 그러니까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면 발견하는 만큼 더 자유스러워지는 것이다. 의식의 변화가 생기면 생긴 만큼 더 자유스러워지는 것이다. 100이 아니면 0이다. all or nothing이 아니라, 이런 단계가 있어서 어느 단계까지 올라가면 그만큼 더 자유스럽고 더 자유스럽고 하는 것이다. 이게 종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큰 혜택이다.

심층종교와 표층종교의 차이: 심층종교는 지금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내 속에 있는 ’참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참나‘를 찾으려고 하는 것, 그리고 ’참나‘가 내 속에 있다고 하는 걸 예기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신비주의라고 한다. 영어로는 spritual이라고 한다. 한국어로 해석하면 영성적인 이런 말 같다. 영성지수가 높아야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