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25일)

나는 몇일 동안 '도가구계(道家九階)', 즉 도에 이르는 9 계단을 살펴보고 있다. 그 9 단계는 다음과 같다. 글을 눈으로 읽음-구송함-글의 문맥을 잘 살펴봄-글에 숨은 내용을 잘 알아들음-일을 잘 실천함-즐겁게 노래를 잘함-그윽함-빔-시원'이다. 위에서 말하는 도에 이르는 아홉 단계는 글을 읽되(부묵)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낙송),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핀 다음(첨명),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섭허),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수역),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오구).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현명), 조용하고 텅 빈 경지(삼료)를 체험한 다음 시원의 도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도(道)가 전수되는 9단계의 과정을 나누어서 몇일 동안 살펴보는 중이다. 오늘은 3단계 이야기를 해 본다. 첨명(瞻明)이다. 첨명에서 첨자는 볼 첨(瞻)자이다. 그러니까 명(明)을 볼 줄 아는 거다. 나는 '명(明)' 자를 좋아한다. '상극의 일치(一致)'라는 말이 최근 나의 화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으면,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사물을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인시,因是)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명,明)이다.
명(明)은 밝을 ‘명’자라고 한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자를 풀이하면,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안다고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외치다 죽은 이유를 난 알겠다. '명'자는 그런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명'자를 <<도덕경>> 제22장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불자현고명 不自見故明
불자시고창 不自是故彰
불자벌고유공 不自伐故有功
불자긍고장 不自矜故長"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니 밝고, 즉 명이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니 빛난다. 세계와 다른 사람을 자기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야 ‘명’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자기를 뽐내며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공이 있게 되고, 자기를 내세우지(자만하지) 않으니 으뜸(리더)이 된다."는 말이다.
제33장에서 또 명(明)에 대해 설명한다. "지인자지, 자지자명(知人者智 自知者明)." 타인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明哲)하다(밝음이다). "승인자유력, 자승자강(勝人者有力, 自勝自强)" 타인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센 데 불과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자라야 진정한 강자이다. 이 두 문장을 읽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알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나는 나를 되돌아 본다는 것이 구심력을 유지하는 것이고, 타인을 바라보는 것은 원심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서야 자신을 깊이 되돌아 보는 묵상이 더 중요한 이유를 깨달았다.
논어 새로 읽기/권순진
사람이 칠십까지 살아 내기가 여의치 않았던 시절
그 나이라면 가르칠 일도 깨우칠 것도 없었겠다.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다 알아차려야 한다 했으니
그 문턱 넘은 뒤로는
다만 제각기 붙은 자리에서
순서대로 순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에 앞서
쉰 다섯 즈음엔 입이 순해지는 구순口順이어야 지당하고
귀와 입이 양순해진 다음에는 눈의 착함이 순서란 말이지
예순 다섯 안순眼順은
세상으로 향하는 눈이 너그러워질 때.
입과 귀와 눈이 일제히 말랑말랑해지면
좌뇌 우뇌 다 맑아져서 복장 또한 편해지겠거늘
아직도 주둥이는 달싹달싹
귓속은 가렵고 눈은 그렁그렁
찻잔 속 들여다보며 간장종지만 달그락대고 있으니.
더 나아가 시비(是非)를 따지는 병폐를 고치려면 밝음(명, 明)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일방적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는 편견을 버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동일한 사물이 이것도 되면서 저것도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거도 저것도' 본다는 말이다. 나에게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는 이 것만이라며 고집하고 그것을 절대 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이 말은 이것이라는 말은 저것이라는 말이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이것이라는 말은 반드시 저것이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이라는 말 속에는 저것이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저것을 낳고, 저것은 이것을 낳는 셈 이다.
아버지만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아들 없이는 아버지도 있을 수 없으므로 아들도 아버지를 낳는 셈이다. 아버지도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고, 아들도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다. 이렇게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방생(放生)'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mutual production', 'Interdependence'이다. "방생방사, 방사방생(放生放死, 放死放生)"는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언뜻 보기에 대립하고 모순 하는 것 같은 개념들, 죽음과 삶, 됨과 안 됨, 옳음과 그름, <<도덕경>> 제2장에 열거한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 것들이, 결국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어울려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울려면,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사물을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인시,因是)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명,明)이다. 중세의 한철학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n)이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실재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영어로 reality, 산스크리트어의 taahta(정말 그러함, 진여), 영어의 let it be 같은 단어를 연상한다. 모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았기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통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젠 '첨(瞻)' 이야기를 한다. '첨'을 보다는 말이다. 인간은 시각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관심이 있는 대상에 눈길을 보내고 다가가서 살펴보고 만져 보고 소유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보려면 먼저 대상을 정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뭔가를 목표로 삼아 눈길을 보낸다. 그건 인간이 수렵과 채집에 길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수렵은 표적을 정해서 돌멩이 같은 무기를 던져 맞히는 행위이고, 채집은 대상을 줍고 뜯는 행위이다. 그래 우리 인간은 목표를 향해 돌이나 창, 부메랑을 던지는 행위에 익숙하다. 던지고 쏘는 대상은 그것만이 아니다. 한턱을 쏘고, 질문을 던지고, 돈을 투자하고, 물량도 투하한다. 표적을 맞히거나 점수를 올리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하거나 죄를 짓는다. 영어의 죄(sin)이 '과녘을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A'라는 지점에 있고, 동시에 'B'라는 지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늘 건너가는 존재이다. 여기서 'A'는 기준에 못미치는 지점이고, 'B'는 지금보다 더 나은 지점이다.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역시 불충분한 상태로 보기 때문에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시도한다. 그때 현재 상황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행동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바로 본다는 것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깨달음과 실천의 시작은 바로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리 가치 판단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려고 시작하면, 내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다. 진짜 다이내믹하고, 한 번에 올인하는 기질도 있고, 굉장히 낙천적이긴 한데 근본적인 통찰 같은 건 약하다.
어쨌든 본다는 것은 대상을 정했다는 거다. 그러나 그 대상을 '보기'에서, 그 말의 깊이는 다르다. 나는 다음 4 가지로 층위를 나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한다. (1) 그냥 보다 (2) 자세히 보다 (3) 관찰하다. (4) 관조하다. 뿐만 아니라, 그 대상 중에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다.
'그냥 본다'는 말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여기서 '무식(無識)'이 등장한다. 무식이란 보이는 것만 보는 시선이 고착화된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두 가지로 드러난다. 하나는 쉽게 화를 낸다.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이 멋대로 만들어 놓은 허상 속에 대상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화는 허상과 실제 대상이 불일치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남들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사리 폭력을 행사한다.
네 번째 층위인 섭허(攝許)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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