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24일)

지난 금요일부터 나는 장자가 말하는 '도'의 전수 과정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재미난 우화이다. "나는 [도를] 부묵(副墨, 버금 먹)의 아들에게 들었고, 부묵의 아들은 낙송(洛誦, 읊는 이)의 손자에게 들었고, 낙송의 손자는 첨명(瞻明, 잘 보는 이)에게 들었고, 첨명은 섭허(攝許, 잘 듣는 이)에게 들었고, 섭허는 수역(需役, 일 잘하는 이)에게 들었고, 수역은 오구(於謳, 노래 잘하는 이)에게 들었고, 오구는 현명(玄冥, 그윽한 이), 현명은 삼료(參廖, 빈 이)에게 들었고, 삼료는 의시(疑始, 처음 같은 이)에게 들었다."
다시 사람 이름들을 나열해 본다. "부묵-낙송-첨명-섭허-수역-오구-현명-삼료-시원"이다. 여기 나온 이름을 우리 말로 풀어 보면 이렇다. '글을 눈으로 읽음-구송함-글의 문맥을 잘 살펴봄-글에 숨은 내용을 잘 알아들음-일을 잘 실천함-즐겁게 노래를 잘함-그윽함-빔-시원'이다. 위에서 말하는 도에 이르는 아홉 단계는 글을 읽되(부묵)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낙송),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핀 다음(첨명),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섭허),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수역),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오구).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현명), 조용하고 텅 빈 경지(삼료)를 체험한 다음 시원의 도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도(道)가 전수되는 9단계의 과정을 나누어서 몇일 동안 살펴보려 한다. 그러니까 '도가구계(道家九階)'라고 말하는 각 단계에서 오래 머물러 본다. 오늘은 2단계 이야기를 해 본다. 낙송(洛誦)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읊어 보는 거다. 이를 우리는 소리내어 읽어 보는 '낭송'이라 한다. 처음에는 글자를 눈으로 읽는 거고, 두 번째는 글자를 소리내어 읽는 거다.
낭송이란 글을 소리 높여 읽는 것을 의미한다. 묵독을 통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수 없을 수 있다. 낭송은 힘이 세다. 글을 소리내어 읽으면 즐겁다. 무슨 글이든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그 나름의 리듬을 넣어 읽게 된다. 그리고 소리내어 읽으면 시각과 청각이 결합돼 학습 효과가 높아진다. 그래서 옛날 서당에서는 크게 소리 내어 읽게 하였다. 의미는 소리를 따라 오기 마련이다. 소리를 내어 읽어보면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좋은 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빳빳이 살아 있는 반면, 나쁜 글은 비실비실 힘이 없어서 읽어도 소리가 붙지 않는다.
낭송, 아니 낭독의 형식은 여러 가지이다. 혼자서 소리내어 읽는 것,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읽는 것, 몇 사람이 분담해서 차례차례 읽는 것, 배역을 정해 희곡을 읽는 것 등이 있다. 낭독은 낭독해 본 사람만 알수 있는 신비한 힘이 있다. 사실 소리의 발견은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고도의 추상적 행위이다. 일본 메이지대학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낭독을 하면 사려 깊게 되고, 임기응변에 대처할 수 있으며, 언어생활도 윤택해질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낭송은 디지털 세계 속에 살면서 디지털 함정에 함몰되지 않도록 인지의 힘을 튼튼하게 하는 운동법의 하나이다. 낭송은 공감각적으로 뇌를 자극해 인식과 기억을 돕고, 행간을 누비도록 허락한다. 낭독의 힘찬 반응도 주목할 만하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부주면 아이는 내용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소리내어 읽노라면 몸의 기운이 상승하고 리듬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낭독에는 힘이 있다. 신체 호흡의 리듬에서 우주의 질서를 느낀다. 우울증을 치유하는 데 시낭송을 능가하는 약은 없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낭송의 힘을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낭송은 고전공부의 필수라 말한다. 그녀에 의하면, 낭송은 신체를 단련하는 데 매우 좋다고 본다. <<동의 보감>>은 "소리의 뿌리는 신장에 있고, 신장은 뼈를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소리 훈련을 하면 신장과 뼈를 단단히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목소리가 흐릿하다는 건 신장과 뼈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 철학사의 거장 왕양명이 <<전습록>>에서 했던 말을 공유한다.
"매일 공부를 할 떼에는 먼저 덕을 생각하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글을 암송하며, 그 다음으로 예법을 익히거나 글짓기 등을 배우고, 그 다음으로 다시 암송한 것을 발표한다든지 노래를 부르도록 한다 (…) 시가(詩歌, 시와 노래)를 가르치는 이유는 마음의 답답함한 응어리를 음악을 통해 풀어주는 데 있다." 시와 노래는 다 낭송을 뜻한다, 요컨대 낭송이란 공부와 신체를 일치시키기 위한 최고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고미숙에 의하면, 아무리 어려운 고전도, 아무리 낯선 고전도 낭송을 통해서라면 거뜬히 접속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다음에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낭송을 하고 암송을 하다보면 문득 깨치는 경우도 아주 많다. 만약 이해를 한 다음에야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고전을 평생 단 한 번도 독파할 수 없을 것이다. 공부란 단지 글자의 자구(字句)만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 담긴 우주적 율려(律呂, 가락)과 접속하는 것이도 하기 때문이다. 고전의 언어는 존재와 세계에 대한 역동적 탐구로 가득하다 따라서 고전을 낭송한다는 것은 우리 몸이 이 원대한 비전과 접속한다는 의미이다.
어제는 동네 공원의 <국화 전시회>에서 "바람이 보내는 경배"로 가을과 접속하였다.
바람이 보내는 경배/우대식
낮은 구름이 비를 몰고 와 스쳐간다
고원(高原)에서,
보낼 것은 보내고 누군가를 기다리기로 한다
돌담 낮은 처마 아래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오―이 길게 짐승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넓고도 높은 구릉으로 오르는 길에는 단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을 뿐이다
나무에는 푸르고 붉은 힘줄이 엉켜 있다
대지 깊은 곳으로 혈육을 찾아가는 그의 여행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며
한순간에 끝날 일이다
색이 바랜 달력이 걸려 있는 벽에 기대어
한 계절을 보내고 일어났을 때
아무것도 오지 않았고 사람은 늙어버렸다
한 철을 떠돌다 돌아온 산장지기는 깊은 목례를 보낸다
한자리에 있는 자에 대한 경례
바람이 보내는 경배를 받으며
다시 고원에 섰을 때
나무도 구릉도 모두 사라지고
짐승 부르는 먼 메아리마저 끊어졌다
자신이 디딘 중력을 잠시 잊고
새 한 마리가 탐욕의 비상을 멈춘 채
허공 한 지점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묵독이든, 낭송이든 우리는 우선 독서가 필요하다. 인간이 신체적 조건은 보 잘 것 없더라도 다른 동물들에 비해 강점은 가진 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던지기이다. 인간과 신체구조가 유사한 침팬지의 공 던지는 속도가 시속 30Km 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 정도는 우리 초등학생 수준 정도란다. 메이저 리그 투구의 구속은 시속 160km를 오간다. 진화론을 처음 주장했던 찰스 다윈에 따르면, 인간은 직립 보행으로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독특한 던지기 능력을 얻었다. 효과적 사냥이 가능해진 건 그 덕분이다. 인간의 던지기는 팔 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어깨를 감싼 인대와 힘줄이 새총의 고무줄처럼 탄성에너지를 응축했다 던지는 순간 풀어 놓는다.
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달리 인간들은 인체 내에 내장된 최고의 기술이 '읽고 쓰기'이다. 스마트폰 같은 기술처럼, 인간 몸에 내장된 기술도 많다. 예를 들어 각종 예체능 분야 고수들의 고난도 기량을 보면 알 수 있다. 개별적으로 특화된 기술 외에 인류 범용으로 확립된 기술이 바로 읽고 쓰는 능력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마음을 길들이고 보다 정교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5만년 전으로 본다. 언어의 발명은 인류 입장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언어는 집단 내 의사소통과 집단 구성원 간 협동을 도왔다. 인간이 개념을 통해 자문자답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학습, 창작 요구를 불태울 수 있게 된 데도 언어의 역할이 컸다.
뒤이어 언어를 담은 문자가 발명되면서 인류는 또 한 번 높이 도약했다. 흥미로운 것은 말의 시대에서 글의 시대로 넘어올 때 저항이 만만찮았다. 요즈음은 문자와 글이 물과 공기처럼 익숙하지만, 그 천하의 소크라테스가 문자에 반대했다.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발명은 "학습자의 정신을 나태하게 만들 것이다. 학습자는 더 이상 자신의 기억을 사용하지 않을 테고, 스스로 생각하려 하기보다 문자로 쓰인 외부 자료를 보다 신뢰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장장 4000년간 인류는 글의 혜택 속에 살고 있다.
문명(文明)이란 말 그대로 '글로 밝아진다'는 것이다. 문화, 인문학 등 문(文)자가 들어가는 곳은 다 문자, 즉 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교, 과학 등도 마찬가지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모든 위업은 이 문자, 즉 글 위에 쌓이고 전수됐다. 게다가 인쇄술의 발명은 여기에 터보 엔진 같은 역할을 했다. 프랑스 인지 심리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앤(Stanislas Dehaene)은 "종이 위 점과 선이 눈을 거쳐 인간 의식에 심상으로 떠오르고 의미로 이해되는 과정은 경이 그 자체"라 말한다. 정말 그렇다.
실제로 인간은 한눈에 단어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글꼴에서 의미를 곧바로 얻지 않는다고 한다. 문자열을 부분으로 쪼개고, 그것들을 다시 문자, 음절, 형태소 등의 위계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친다고 한다. 이 같은 분해와 재결합이 모두 자동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읽기는, 특히 소리내어 읽기는 뇌신경에 길을 내고 닦은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묵독이든 낭독이든 독서는 새로운 능력을 학습, 지능을 어떻게 확대하는지 명확이 보여준다. 던지기가 사냥을 위한 고도의 신체 기술이었 듯이, 읽기는 뇌 속 소프트웨어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신생 기술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의 양극화보다 두려운 것이 '지(知, 앎)의 양극화'이다. 많은 사람이 자동화로 인한 인간의 위기와 부의 양극화를 걱정한다. 그런데 실상 그 못지않게 우려해야 할 게 '지의 양극화'이다. 오늘날처럼 대중이 짧고 쉬우며 직관적인 이미지에만 반응하면, 자칫 사고마저 얕고 단순해질 수 있으며, 이를 방치하면 획일적 대중과 창의적인 소수 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 있다.
그럴 겨우, 가짜 뉴스와 선동을 앞세운 포퓰리즘의 위험도 커질 것이다.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창의적인 소수도 안심할 수 없다. 그런 양상은 이미 지식 생산 영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표면화되고 있다. 예컨대, 과학 시대의 지식은 인프라와 인력을 갖춘 곳에서 격차를 벌려간다.
독서는 인간이 딛고 심연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있는 도약대이다. 하지만 이 마법의 기술은 얕고 가벼운 공짜 오락물을 앞세운 또 다른 기술들의 파상 공격으로 주춤거리는 중이다. 어떤 신기술도, 그 기술이 만들 새 세상도 인간이 생각하는 능력을 잃는다면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인류가 꿈꾸는 미래 역시, '그 너머'를 생각하는 능력에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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