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동네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동천 단풍길 걷기 한마당>에 가 가을을 즐길 계획이다. 평소 내가 즐겨 걷는 길이지만, 함께 걷는 즐거움도 크다. 점심까지 얻어 먹고 올 생각이다. 그리고 어제는 내가 대표로 있는 <신성리빙랩>이 주관하는 2차 주막놀이터 축제에서 두시간 동안 어린이들이 노는 것을 도왔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했다.
붓다는 인간 마음의 가장 숭고한 상태를 산스크리트어로 "브라흐마비하라"라 했다. 숭고함이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다. 숭고함의 의미는 '셀 수 없는/경계가 없는'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셀 수 없는 마음'이 된다. 나는 이것을 '사랑의 4단계'라고 본다. 계단을 오를수록 더 어렵다.
(1) 자(慈)=마이트리(maitri, 산스크리트어)=헤세드(hesed, 히브리어)=아가페(agape)=참된 사랑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 사랑의 초점은 상대방에게 있다. 만일 그 초점이 자신에게 있고 상대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자'는 상대방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살펴야 상대방에게 행복을 주려는 마음이다. 한자 '자(慈)'를 해석하면,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가물가물(玄)해져, 하나가 된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이트리, ‘자’는 소극적으로 내가 타인을 내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조성하는 작업까지 포함하는 큰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기꺼이 주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숨은 노력이자 배려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향한 마음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한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인류는 그 순수한 마음을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아 각자의 심연에 간직하고 있다. 교육이란 이 심성을 체계적으로 일깨우는 자극이다.
(2) 비(悲)=카루나(karuna)=compassion(연민)
‘비’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당한 상처나 고통을 함께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거나 제거하려는 마음과 행동이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비참한 상황에 처한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비'는 그런 감정 이상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동일하게 느껴, 그 상대방을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과 행동이다. 영어로 ‘컴페션(compassion)'이다. 미 말은 상대방의 고통(passion)을 기꺼이 함께(com) 나누려는 마음이다. ‘카루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걱정, 근심, 슬픔,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상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관세음보살의 마음은 대자심이 아니라, 대비심이다.
- 상대방의 슬픔에 동참한다.
- 상대방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치를 취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앉아 말없이 그의 슬픈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3) 희(喜)=무디타(mudita)
'희'는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느끼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행복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줄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노력이다. 실제는 카루나보다 더 힘들 수 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겠는가? 상대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 아상(我相, 나가 있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까운 친구, 동료 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의 성공을 시기나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면, 무디타란 숭고한 감정을 소유한 자이다.
4) 사(捨)=우펙샤(upeksha)
‘사’는 버린다는 것으로, 마음에 집착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위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수련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주위에 일어난 유혹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정진하는 의연함과 자신감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갈 뿐이다. 고생 끝에 산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볼 때 느끼는 그 감정이다. 눈앞에 탁 트인 광경이 펼쳐지는 이유는 정상에 올라온 사람의 시선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마음이다. 그리고 사람의 배경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다.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을 없애는 것이다.그냥 무덤덤하게 대하는 마음은 아니다. '자비희(慈悲喜)'를 모든 존재들에게 평등하게 내는 마음이다.
이 '사무량심'으로 무장한 사람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속에 쾌적을 유지하는 자이다. "요가 수련자의 마음은 자, 비, 희, 사의 실천을 통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쾌적하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사실 어떤 사건이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없다. 이런 감정들은 그 사건에 대해 나의 반응일 뿐이다.
이젠 빨리 나가, 내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탄동천을 걸으며, "가을의 유서"를 읽으련다.
가을의 유서/류시화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이 되어버린
내 작은 노트 위에 마지막 눈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하얗게 돌아선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페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조각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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