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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진리가 무엇이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는 30세에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 최고의 가치와 그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패러다임을 깨닫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예수는 죽음을 걸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켰다.

10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외국인의 통치를 받아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가 오기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 학의 목처럼 목을 길게 빼고 간절히 기다림)하였다.

기원후 4세기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유일한 종교로 수용한 후,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생각은 서양인들의 인식에 깊이 새겨졌다. 그 죄의식은 지난 2000년 동안 서양인들에게 반유대주의의 원인을 제공했고, 20세기는 인류 최대의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야기했다.

예수의 언어인 아람어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도교의 많은 개념들은 그리스 문명의 세계관에 유사한 개념으로 대치되었고, 그리스도교는 그 유사 개념어를 바탕으로 로마 세계에 소개된다. 이때가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형성된 시기이며,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셈족 종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 유럽 종교로 변모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수동적이며 마지못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집이 세고 영악하며 무자비한 총독이자 ‘황제 종교’의 제사장이었다.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에, 빌라도 앞에서 예수가 한 말들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이다."

여기서 '증언하다'는 것은 자신이 말한 내용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의지이자 결심을 나타낸다.

서양적인 사고에서 진리란 변하지 않는 것이며 왜곡이 없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며, 우주 안에 항상 편만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우주는 늘 변하기 때문에 진리일 수 없다. 따라서 빌라도의 눈에 진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의 이데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진리는 히브리어로는 '에메쓰(emeth)'이고, 아람어는 '아누마(anuma)'이다. 교회서 사용하는 '아멘(amen)'과 같은 어원이다.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에메쓰'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고 그 결심을 지키려는 충성심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 초기에 진리는 '덕'으로 번역되는 '아레테(arete)'가 배움의 최종 목적이었다. ‘탁월성’이라고도 한다.

에페소(에페소스)의 켈수스 도서관은 로마의 통치자들을 지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세운 도서관이었다. 이 도서관 아래, 즉 네 개의 여신 동상 아래에는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1) 소피아(sophia)=지혜: 공부를 많이 해서 사지선다형에서 옳은 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신속하게 답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혹은 적대적인 상황에서 창의력을 발휘해 그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이다. 소피아는 원래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경험을 통해서 지식이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공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무아(無我)의 상태로 진입하는 연습이며, 끝없는 상상을 통해 그것을 현실과 연결시키는 노력이자 과정이다.

2) 엔노이아(ennoia)=생각이라는 행동/묵상/이해: 생각이라는 행동은 사물이나 사람 혹은 개념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 그 생각의 대상과 일치하는 과정이다.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편견과 오해, 지식으로 대상을 판단하기 쉽다. 생각을 깊이 할수록 그 생각이 맑아지고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 이유는 홀로 방에 앉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생각의 대상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사물 개념에 적용시킨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소문이나 풍문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얻은 거짓된 지식을 간파할 수 있고 자신만의 시선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엔노이아는 다른 사람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희로애락으로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3) 아레테(arete): 호메로스 시대의 아레테가 전쟁에서의 용맹성과 연설에서의 수사학적인 능력인 반면, 로마 시대의 아레테는 인간의 지식과 연관이 깊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잠재력은 지식이며 인간의 모든 다른 능력은 바로 이 지식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얻는 방법을 묵상(contemplation)이라고 말한다. 흔히 '탁월성' 또는 '덕'으로 번역된다.

4) 에피스테메(episteme)=참된 지식: 플라톤은 인간의 지식을 '거짓된 지식'인 '독사(doxa)'와 참된 지식인 에피스테메로 구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나 '소문', 즉 '독사'일 뿐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기껏해야 편견에 서로 잡힌 사람이나 미디어가 전달한 내용을 전해들은 것뿐이다. 또는 자신이 '직접 본' 세계를 전부로 여겨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착각한 채 그 편견을 전달한다.

참된 지식, 에피스테메는 우리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나 패러다임이다. 에피스테메는 세상의 원칙에 관한 것이며 이것들은 인간이 공부를 깊이 할수록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진리이다.

예수가 말하는 진리는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다르다. 예수가 말하는 진리는 내적인 결심과 그 결심을 인내로써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어떤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갖는 마음가짐이다.

삶의 태도=마음가짐.

이 마음가짐에서 출발해 자신의 삶이 서서히 변하고,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들어서고,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것을 지키려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진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지켜보는 초월주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개입해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 과정으로서의 '믿음'이다.

예수는 "나는 진리, 즉 인간 안에 씨앗으로 존재하는 신의 형상을 잘 키워 그것을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심지어는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나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으로.